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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唐) 1

by cpark240 2023. 5. 17.

8세기 당나라

- 당나라 초기

 

 

당(唐, 618년~907년)은 수나라와 오대 십국 시대 사이에 존재한 중국의 통일왕조입니다. 수도는 현재의 시안인 장안이었습니다.


초대 황제인 이연(李淵)은 수나라 말기에 권력을 잡아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건국했습니다. 7세기와 8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정부에 등록된 인구 수는 약 5,0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 후 중앙 정부가 붕괴되어 인구 수를 제대로 조사하기 어려웠던 9세기에도 인구 수는 8,000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고 추산됩니다. 이러한 인구 수 덕분에 당나라는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유목민을 상대하기 위해 전문적인 징집병을 양성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비단길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왕조와 국가들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일부 지역은 당나라가 직접 정복해 간접적 통치를 하는 경욱도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오랫동안 안정된 정치를 유지했으나 안사의 난 이후 중앙집권체계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당나라는 선비족 8주국 군사들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사대부들은 과거제나 관리들의 추천을 통해 관직에 등용되었습니다. 9세기에 절도사로 알려진 지역 군 통치자들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통치 체계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도자기 문화가 이 시기에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인 이백과 두보가 당나라 시대에 살았으며 유명한 화가들인 한간, 장훤, 주방도 당나라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다양한 역사책을 출간했으며, 지리서와 백과사전도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목판 인쇄의 발달과 같은 수많은 기술적 혁신도 당나라 시대 때 일어났습니다.

 

당나라 시대에 불교가 중국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확산되었고 중국 고유의 불교 종파가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당 무종이 폐불을 선언하면서 불교의 영향력은 쇠퇴했습니다. 9세기에는 왕조와 중앙 정부가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예술과 문화는 계속 융성했습니다. 또한 9세기에도 여전히 당나라의 상업 활동과 무역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9세기 후반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관료제 전체가 타격을 입었고, 이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 기원>

수나라 왕조의 외척이며 독고씨 등 친척이 모두 선비족이였던 선비족 출신 이연이 수나라 말기 혼란을 수습하고 퉁구스인들인 8주국 관롱집단 무천진 선비족들과 함께 북주 때부터 피지배민족으로 전락한 한족(漢族)들을 굴복시키고 장안에서 당나라의 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의 역사로 표방하고 있으나 많은 역사학자들은 선비족의 정복왕조로 보고 있습니다. 당나라 선비족들이 한족과 중국을 정복해서 성립된 국가이며 북위부터 시작한 선비족에 복속당한 중국과 한족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당 황조의 이씨는 수나라와 양씨와 같이 무천진 관롱집단 출신으로 북주, 북위 이래 팔주국 십이장군을 칭하는 선비계입니다. 당시 탁발씨가 북위를 세우고 북위의 선비족 장군 우문각타라니가 북주를 세우고 선비족 양견이 수를 세운 다음 선비의 장군이였던 이세민의 아버지가 북주의 군벌이자 대사마인 독고신(獨孤信)의 넷째 딸과 결혼하여 낳은 게 이세민이므로 이세민은 선비족입니다. 북주 때 행해진 선비족 복고정책 때 당왕조의 이씨는 북주(北周)로부터 대야(大野)라는 성씨를 하사받습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진인각(陳寅恪)이 당대정치사술론고(唐代政治史述論稿)에서 선비계의 관롱집단에 속하는 조군(趙郡)의 이씨가(선비족) 당조를 건국했다는 것을 정론으로 하여 정론으로 되었습니다.

 

- 초기

 

본디 이연의 가문인 농서 이씨는 수나라 시절 북방을 다스리는 유력 가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의 후손이라고 자칭하였으며, 오호 십육국 시대 서량의 시조인 이고의 핏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당나라의 첫 황제 이연의 모친은 태목황후(太穆皇后) 두씨(竇氏)였습니다 참고로 당나라의 첫 황제 이연의 모계 쪽은 탁발선비족이었습니다.

 

이연은 수나라 말기에 당국고으로 산시성(山西省)의 지배자였는데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하여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에 실패하면서 정국이 크게 혼란해지자 점차 새로운 황조를 개국 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연은 이미 상당한 군사적 경험과 부를 축적하였으며 사람들의 지지까지 받으며 힘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연은 수나라 황실과 이종 사촌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연은 아들인 이세민의 조언을 받아 617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아들인

이세민과 딸이자 여걸이었던 평양공주(平陽公主)가 군사를 지휘했습니다. 617년 겨울 이연은 장안을 함락하였고 당시 수나라 황제였던 양제를 사실상 폐위시켜 태상황으로 만들었고, 대신 양제의 손자인 양유(楊侑)를 수나라 공제(恭帝)로 즉위시켜 꼭두각시처럼 만들었습니다. 이연에게 굴복한 양유는 조서를 내려 이연에게 가월(假鉞)의 칭호를 하사하고 사지절(使持節) 겸 대도독내외제군사(大都督內外諸軍事) 및 대승상(大丞相), 당왕(唐王)에 봉하여 모든 권한을 넘겨 주었습니다.

 

618년 6월18일에 양제가 휘하의 장수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하자, 이연은 6월에 공제에게 제위를 선양받아 당나라의 건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연은 이후 고조로 즉위하여 626년까지 중국을 통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아들인 이세민에게 의하여 강제로 양위해야만 했습니다. 18세의 나이부터 군사를 다룰 정도로 문무에 뛰어났던 이세민은 당나라의 건국 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우며 황제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당 고조는 이세민을 진왕이자 천책상장(天策上將)으로 봉할 정도로 그를 아꼈습니다. 

이세민이 이처럼 황제의 신임을 받자 장남이자 황태자였던 이건성과 삼날 이원길이 불안을 느꼈고, 그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 견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도 형제들 간의 갈등은 증폭되었고, 결국 이세민은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궁궐 내에서 이 2명의 형제들을 살해하였는데 이를 현무문의 변이라고 합니다. 이세민은 이후 황태자에 봉해졌고, 고조는 반강제로 이세민에게 양위하고 황위에서 물러났습니다.

 

<정관의 치>

 

태종 이세민은 비록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쫓아내고 제위에 오르는 등 황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는 유교적 가치들을 범하였으나, 제위에 오르고 난 이후에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당나라 최고의 명군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그는 항상 대신들의 조언들을 귀기울여 들었으며 백성들의 생활을 잘 보살 핀 황제였습니다. 628년에는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법회를 열었으며 629년에는 주요 전투가 일어났던 전장지에 사찰들을 세워 중들이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편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기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건국 당시 당나라의 북방에는 돌궐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일찍이 수 문제는 갈등관계를 이어오던 돌궐이 조공을 하도록 영향을 행사하고 분열을 조장하여 세력을 약화시킨 바가 있었는데 태종에 이르러 돌궐을 정복함으로써 태종은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모든 북방민족을 아우르는 천가한 칭호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고창국과 비단길 일대를 장악하고 돌궐을 정복하여 당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와 군사제도도 정비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지자 당나라 시대의 율령 체제가 완성되었으며

국가 발전의 기틀이 잡혔습니다. 태종이 황제였던 시대에 이러한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라고 부릅니다.

 

<고구려와 당 전쟁>

 

당 태종은 즉위할 무렵 잠잠하던 돌궐의 침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태종은 군사를 일으켜 돌궐족을 공격하여 이겼고, 당나라는 돌궐족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서쪽의 고창국 등 여러 국가를 공격해 정복하고서 책봉을 받았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장군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였고, 실권 잡고서 보장왕을 옹립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태종은 일단은 고구려오 동맹을 맺어 국력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했고 그러는 한편 첩자를 파견해 지리를 파악해 요동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태종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남쪽으로 베트남의 부족들을 토벌해 교지 지역을 얻었습니다.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의 빌미를 잡았고 그 직후 군사를 모아 정벌을 떠났습니다.

 

당시의 군사는 보병 7만명, 수병 6만명과 기병 3만명으로 추정됩니다.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이 무너지자 당시 고구려의 대막리지였던 연개소문은 15만 구원군을 급파하지만,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태종의 친정군에게 크게 패하고 3만명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양만춘(梁萬春)이 방어하고 있던 안시성을 점령하지 못했고 시간을 끌게 되자, 겨울이 되어 군량 등의 공급에 차질이 생겨 결국은 철수했습니다. 이후로도 태종이 고구려에 병력을 파견하기도 하지만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이후 즉위한 고종은 신라의 요청이란 명분으로 한반도로 군대를 출병시켰고, 이로 인하여 660년 백제가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당나라는 곧바로 661년 고구려로 향해 평양성을 포위하지만 투르크계 철륵의 반란과 결정적으로 옥저도 행군총관 방효태의 패배와 소정방의 고립 등으로 말미암아 실패했지만, 연남생의 귀순으로 고구려의 배분을 감지하고서 

667년 병력을 일으켜 668년 9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에도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 신라의 땅에는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완전한 중국 영향력 내에 넣으려 시도하였으나 이에 반발항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과 힘을 합쳐 나당 전쟁을 벌이고 당나라를 쫓아내는 데에 성공하면 당나라의 이러한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