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나라 중기
측천무후
측천무후는 당태종의 후궁으로 처음 궁으로 들어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늙은 태종을 제치고 궁에서 가장 권력이 강력한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그 후 그의ㅣ 아들인 당고종의 후궁으로 들어갔고 이윽고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권력을 잡은 방법은 매우 잔인하고 냉정하였는데 야사에 의하면 그녀가 직접 그녀가 낳은 자식을 죽인 후에 그 죄를 당시 고종의 황후에게 돌려 황후를 쫓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꿰찼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고종은 655년에 쓰러졌고, 황실의 대소사를 거의 측천무후와 상의하여 처리 할 정도로 그녀에게 대부분의 국정을 일임하였습니다. 측천무후는 수렴 뒤에 앉아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당시 황태자였던 이충(李忠)을 폐위시켰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을 그 자리에 올렸습니다. 허나 이홍은 측천무후의 뜻에 어긋나는 언행을 한 이후 의문사하였고 무후는 이홍을 대신하여 차남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습니다.
683년에는 드디어 고종 황제가 사망했고 이현이 황위에 올라 중종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중종은 그의 아내였던 위황후의 측근들을 대거 임용하였고, 친정아버지인 위현정을 시중으로 세우려하였습니다. 이는 측천무후의 분노를 샀고, 중종은 결국 즉위 한 지 6주만에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측천무후는 중종을 여릉왕으로 격을 낮추어 내쫓았고 4남이었던 예종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황족들 가운데에서 684년에 반란이 일어났으나 측천무후의 군대가 2달도 되지 않아 이들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녀는 690년 10월 19일에 주(周)나라를 건국하였으며, 전 황제였던 예종에게 선양받아 여황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무후는 엄격한 감시체제에 기대어 공포정치를 펼쳤고 정적들을 가ㅏ없이 처벌하였으며 또한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려 하였습니다.
측천무후는 혹리들을 이용하여 고발 제도를 크게 활성화하였고, 이 때문에 조정의 신하들은 하루하루를 살얼음판에서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측천무후는 적인걸과 같은 뛰어난 재상들을 등용하며 내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국정 운영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며 일반 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켰습니다. 이때의 안정이 나중에 현종 시대의 개원의 치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입니다. 측천무후의 재위기에는 무후의 막강한 권위를 바탕으로 무씨 가문들이 득세하였습니다. 699년 즈음에는 측근들의 폐단이 워낙 심각해졌고, 705년에 측천무후가 병이 들어 몸이 약해지자 주위에서는 다시 이씨의 당나라에게 제위를 돌려주라는 압박이 강해졌습니다. 결국 705년 2월 23일에 당나라 중종이 다시 제위에 올랐으며 당나라는 3월 3일에 공식적으로 복귀에 성공합니다.
<개원의 치>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 이후에도 여성들이 권력을 잡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706년에는 중종 황제의 아내였던 위황후가 황제를 꼬드겨 그녀의 딸과 누이들로 조정의 요직들을 맡게 하였고, 709년에는 오직 아들들에게만 허가되어있던
상속권을 여성들도 맡을 수 있게 법을 개정하였습니다.
위황후와 안락공주 모녀는 결국 중종을 독살하였고 대신 상제 이중무를 새로운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웠습니다. 2주 후, 임치왕 이륭기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궁으로 들어와 위황후와 측근들을 베고 다시 예종을 황위에 복귀시켰습니다. 하지만 중종이 위황후에게 좌지우지당했듯이 예종도 태평공주에게 휘둘렸고 712년에 태평공주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714년에 목매어 자살한 이후에는 예종이 현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당나라는 측천무후의 내란으로 잠시 쇠퇴하였다가 현종때에 다시 부흥하니 이를 개원의 치라고 합니다. 현종은 44년 동안 통치하였고 이 시기 당나라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 교회인 경교가 전래될 정도로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띠었습니다. 현종은 그 시대에도 상당히 진보적인 정책들을 폈는데, 747년에는 사형제를 폐지하였으며 모든 사형수들은 황제의 재가를 받은 경우에만 처형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대문에 730년에는 중국 전체에서 오직 730여 명의 사람들만 처형당했을 정도였습니다, 현종은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으며 현명한 저이를 펼쳤으며 장구령과 같은 명재상들을 임용하여 디플레이션을 해소하고 동전의 사적 발행, 사용을 장려하여 돈의 흐름을 원활히 하였습니다.
다만 그의 후임자인 이임보는 동전 발행을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동돌궐, 토번, 거란 등의 이민족의 침공을 막았고, 수 년간의 태평성세를 이루었습니다. 허나 현종의 이러한 통치기는 741년 즈음부터 현종이 며느리였던 양귀비에게 빠지며 퇴색하게 됩니다. 현종은 양귀비와 놀며 슬슬 국정을 방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737년 이후 현종은 오랫동안 집권한 재상의 이임보에게 대부분의 국정을 떠맡겼고 이임보는 비-한족 인사들에게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고 군권을 주며 마음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당나라 후기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750년에 현종은 석국(石國), 즉 타슈켄트가 제대로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슈켄트와의 전쟁을 감행합니다. 당나라 군은 승승장구하여 수도인 타슈켄트를 점령하고 장안에서 타슈켄트의 왕을 처형했습니다. 그러자 타슈켄트의 왕자가 당나라 군을 몰아내기 위해 대식국(아랍)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751년 4만 명의 아랍과 투르크 연합군이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탈라스 강에서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맞섰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인 당나라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당나라 군이었으나, 아랍군이 당이 다민족 군대인 것을 이용해 내분을 일으켜 탈라스 강 전투에서 고선지는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로 겨우 몇 천 명의 당나라 군사만이 살아 돌아갔고, 아랍이 서역의 패권을 차지해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습니다.
<안사의 난과 쇠퇴>
당나라는 8세기 중반까지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으나 안사의 난이 일어나며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사의 난의 주도자였던 안록산은 반은 소그디아나인, 반은 투르크인으로서 744년 이래 당나라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744년에 만주에서 변방의 민족들과 싸우며 경험을 쌓았으나 딱히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습니다. 안록산은 허베이성 인근을 통치하며 힘을 모았고, 결국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는 한시적으로 자신을 황제로 참칭하였고 연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당나라는 곽자의와 같은 명장들의 공으로 초기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미 무너져가던 당나라 군대는 변방에서 단련된 안록산의 군대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조정은 장안에서 피난을 갔으며 결국 현종은 쓰촨성으로 달아난 채로 위구르 칸국에게 구원을 청했습니다. 위구르의 칸이었던 바얀추르 칸은 이 구원 요청에 크게 기뻐했으며 당나라의 공주를 자신의 신부로 맞는 등 우호 관계를 다지며 이 요청에 응했습니다.
위구르 족은 당나라가 다시 장안을 정복하는 것을 도왔으나 당나라가 막대한 양의 비단으로 배상하기 전까지 군대를 물리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티베트도 당나라가 흔들리는 것을 감지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중국 대륙을 약탈하였으며 842년에 티베트 제국이 무너지고 난 이후에도 당나라는 중앙아시아를 되찾을 힘이 없을 정도로 전락하였습니다. 당시 당나라의 쇠락이 워낙 심했기에 과거제의 주제도 '왜 당나라는 쇠락하고 있는가?'라는 주제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안록산은 757년에 환관들 중 한명에게 살해당하기는 하였으나, 763년에 안록산의 부장 사사명이 아들에게 살해당하기 전까지 전국에서는 여전히 혼란과 소요가 계속되었습니다.
대략 710년 경부터는 지방의 절도사들이 막강한 군권을 바탕으로 점차 권력을 노리기 시작하고 중앙 정부게 반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안사의 난 이후에는 허베이성의 절도사들이 가진 자치권과 권력이 중앙 정부의 통제를 넘어섰으며 781년과 784년 사이에 일어난 반란들 이후에는 중앙 조정이 반란이 일어날 때 빠르게 진입 할 수 있도록 허베이, 산동, 후베이, 허난선의 절도사들에게 조정의 재가 없이 마음대로 지방의 대소사들을 처리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버렸습니다.
당나라는 이들이 지방에서 일어나는 소요들을 빠르게 진압하고 조정에게 충성을 유지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조정은 이들에게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 할 수 있는 권한, 조세권, 직위 승계권까지 주며 막대한 권한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절도사들은 점차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통제를 벗어났고 나중에는 군벌에 가까울 정도로 독립적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러한 절도사들의 난립은 960년에 송나라의 중앙집권제가 구축 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땅을 팔고 살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부유한 지주들이 강제로 가난한 자들의 땅을 빼앗아 많은 사람들이 유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으며 반면 대지주들이 출몰하였습니다. 755년에 토지 분재제 제도가 무너진 이후부터는 중국 중앙 정부는 송나라 시대의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토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직 세금을 걷는 일에만 치중하였습니다.
중앙 정부의 힘이 무너지자, 845년 즈음에는 100여 개가 넘늠 수적들과 강도 무리들이 양쯔 강 인근의 도시들을 약탈하였음에도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858년에는 대운하 인근에 대대적인 홍수가 일어났고 북부 중국 평원의 토지와 논밭들을 대거 휩쓸며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며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익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후 당날라가 더이상 천명을 잃어버렸다고 여기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져 이 혼란을 끝낼 것이라고 소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873년에는 대규모의 흉작이 발생하였고 제국의 근간 자체가 흔들렸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평년의 절반도 안되는 수확량을 거두며 곡물이 태부족해졌고 사람들이 수없이 굶어죽었습니다. 당나라 초기에 중앙 정부가 제대로 작동 할 때에는 가격 규제나 곡물을 풀고 토지제를 정비하여 이같은 자연재해에 제대로 방비할 수 있었으나. 9세기 후반 경 당나라 조정은 이미 국가을 통치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