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나라 건국
<원나라 말기>
몽골족이 건국한 원나라는 14세기에 들어와 점자 그 병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원나라는 법에 한족 차별을 공공연하게 명시하였고 한족들을 혹독하게 차별하였기에 원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동안 쌓여왔던 한족들의 불만은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원나라 조정의 경제적인 실정이 겹치며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황허가 범람하며 수많은 토지들이 버려지며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1351년에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홍건적은 비밀결사단체인 백련교가 주도하였습니다. 이때 한족이였으나 원나라 시절 농민으로 격하되었던 주원장이 1352년에 홍건족 군대에 합류하였고 그는 반란군 지도자의 딸과 결혼하며 명성을 쌓아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은 인구 80% 이상이 성씨가 없던 농민과 노비였고 귀족만 한족 족보를 내세울 수 있었는데 원나라 때 많은 한족들이 몽골군의 소작농으로 격하되었고 그 중에 주원장이 있었습니다. 1356년에는 주원장이 이끄는 반군이 난징을 점령했습니다. 후에 주원장은 이 곳에 명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백련교의 교주였던 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는 종교적이였기 때문에 현대 중국에선 명나라를 사도적인 국가였다고 평가합니다. 주역과 괘가 만연했고 성리학이 유행하여 실리적인 것은 배척되었습니다. 이는 예전 송나라도 비슷하였으며 주역 등 종교와 성리학이 만연했기 때문에 실리와 과학이 발달되지 못하여 실리적인 청나라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원나라가 흔들리자 나라 곳곳에서는 수많은 반란군들이 일어났으며 자기들끼리도 새 왕조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끊임없이 대립하였습니다. 1363년 주원장은 파양호 대전에서 그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을 꺾은 후 한족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얻어냈습니다. 파양호 대전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해전으로 여겨집니다. 주원장은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65만 명에 달하는 진우량의 군세를 꺾는 데 성공했고 이 역사적인 승리는 결국 주원장을 압도적인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강력한 반군 세력으로 떠올랐으며 이후에도 영향력을 끊임없이 굳혀나갔습니다. 1367년에은 홍건적의 지도자들이 주원장이 초대한 연회에서 알수 없는 이유로 죽었고 이들마저 없어지자 더이상 중국에는 주원장의 새 왕조 건국에 반대할 세력들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세를 다잡은 주원장은 1368년에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에 군사를 보냈고 이미 망해가던 원나라는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수도를 버리고 상도가 있는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주원장은 대도에 있는 원나라 궁전을 불태워버린 후 새 왕조인 명나라의 건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직후 대도는 '베이징'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주원장은 '홍무'를 자신의 연호로 삼았습니다.
<홍무제의 치세>
홍무제는 원나라의 실정을 극복하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국가 기반시설을 다지는 데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48km에 달하는 벽을 난징에 쌓았고 그와 함깨 새 관청들과 황궁도 지었습니다. 명역사에는 1364년부터 이미 주원장이 유교에 기반한 새로운 법전인 대명률을 만들고 있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대명률은 1397년에 편찬이 끝났으며 653년에 만들어진 당나라 시절의 법전을 참고하여 만들어졌습니다. 홍무제는 위소제라는 이름의 군사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위소제는 당나라의 부병제와 비슷한 제도였습니다. 또한 이갑제를 실시하여 지방과 국민들에 대한 통제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1380년 홍무제는 명나라 건국의 공신이자 당시 재상이었던 호유용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처형해버렸습니다. 이후 그는 재상이 있던 중서성을 대폭 축소, 폐지하였고 6부의 직속 상관을 황제로 지정하여 이 권한들을 대거 황제의 것으로 가져왔습니다. 홍무제는 점점 더 공신들과 대신들에게 의심을 키워갔고 결국에는 비밀경찰 조직인 금의위를 창설하여 신하들을 끊임없이 감시하며 의심가는 자는 누구든지 숙청했습니다. 대략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홍무제는 재위 내내 원나라의 풍습을 금지하는 칙령을 여러 차례 내렸고 이민 왕조의 통치로 더렵혀진 한족들의 문화를 정화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다만 원나라의 정책들 중 쓸모 있다고 여겨진 것은 그대로 바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또한 몽골식의 군사 훈련법, 몽골의 영향을 받은 의복과 모자들, 몽골식 궁술과 승마술은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명나라는 초기를 제외하고는 몽골 출신 신료들도 그대로 임용하여서 16세기 말에는 몽골인들이 금의위에도 진출했을 정도였습니다.
홍무제는 몽골, 일본, 고려, 여진, 티베트의 왕들에게 일종의 '조언' 내지 명령을 여러차례 써보내어 그들이 명나라의 수도를 방문하여 경의를 표할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그는 10만 명에 달하는 몽골인들을 쫓아내지 않고 중국 내부에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발전과 번영>
<영락제의 치세>
1398년 홍무제가 죽자 의문탲다 주표의 아들인 황태손 건문제가 새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허나 건문제와 홍무제의 가장 강력한 아들이었던 연왕 주체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 결국 베이징을 중심으로 북방의 방비를 맡았던 주체가 반란(정난의 변)을 일으켰습니다. 주체는 노회한 대신들에게서 어린 건문제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변을 일으켰으나 실제로는 난징에 있는 황궁과 함께 건문제, 그의 아내와 어머니, 신하들까지도 모두 죽여 태워버렸습니다. 1402년 주체는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서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가 바로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입니다. 영락제는 매우 유능한 황제였고 학자들은 보통 그가 '두 번째 건국'을 이루었다고 평할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다만 영락제는 홍무제의 정책 대다수를 뒤집으며 명나라를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바꾸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천도와 정벌 사업>
영락제는 즉위한 직후 원래 수도였던 난징을 버리고 1403년에 자신의 힘이 강했던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했습니다.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1407년에서 142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수 백만 명의 일꾼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이 때 베이징 내성이 건설되었고 특히 이 때 자금성이 건설되는 등 많은 토목사업들이 진행되었습니다. 1553년에는 외성이 베이징 남쪽에 추가적으로 건설되었고 베이징 성내의 넓이를 거의 2배 넘게 넓혔습니다.
1405년부터 영락제는 그가 총애하던 환관 정화에게 거대한 해상 함대를 맡겨 해외 원정을 떠나게 했고 이를 정화의 원정이라고 합니다. 중국인들은 한나라 이래로 끊임없이 해외로 사절들을 보내고 국제 무역을 하기는 하였으나 정화의 원정은 규모와 동원 된 선박 수 면에서 이같은 선례들을 훨씬 초월했습니다. 총 7번의 원정이 있었으며 난징 조선소는 1403년부터 1419년까지 2천 척에 달하는 배들을 건조했습니다. 어떤 배들은 길이가 112m에서 134m까지 이르렀으며 너비는 45m에서 54m였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배였습니다.
영락제는 중국의 앞선 인쇄술 기술을 이용하여 중화 문명을 퍼뜨리기 위해 전세계에 책을 전파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몽골, 베트남 등의 지역들에 군사 원정도 수없이 실시하여 명나라의 국경도 크게 넓혔습니다. 이때 베트남이 한시나마 중국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1406년에 시작된 이 식민 통치기는 1427년에 베트남의 국민 영웅 레 러이가 게릴라 전투를 통해 명나라를 쫓아내고 레 왕조를 세우며 끝나게 됩니다.
<토목의 변>
한편 몽골 고원에서 서 몽골의 오이라트가 힘을 얻어 몽골을 제압하고 명나라에 침공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1449년 영종은 측근인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오이라트 원정에 나섰습니다. 황제는 그의 이복형제인 주기옥을 수도에서 내정을 섭정으로 관리하도록 맡겼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이라트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9월 8일 에센 오이라트 군대는 정통제의 군대를 박살냈고 정통제는 산채로 포로로 잡히는 대치욕을 당했습니다. 이를 토목의 변이라 합니다. 허나 정통제가 잡혔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수도의 섭정 주기옥이 새로운 황제인 경태제로 즉위하였고 경태제의 유능한 대신인 우겸이 오이라트 족에게 매우 강경하게 대응하여 이들을 쫓아내는 데에 성공하자 오이라트 군대는 더이상 정통제를 인질로 잡고 있어보았자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라 결론지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통제를 죽이는 대신 명나라로 살려 보냈고 정통제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선황이라는 허울좋은 칭호를 가지고 가택연금되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엗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정통제가 1457년에 경태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다시 황위를 되찾게 됩니다.
이 때부터 정통제는 새로운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고 이 시기부터는 천순제로 불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정통제와 천순제는 동일한 인물인 것입니다. 1461년 8월 7일 장군 조흠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황제의 숙청 작업에 말려들까봐 염려하여 미리 천순제를 상대로 난을 일으켰습니다, 조흠 장군의 군대는 황성의 서쪽과 동쪽 문에 불을 지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비가 내리며 불이 꺼졌고 수도 외곽에서 황제의 친위군이 몰려오면서 결국 자결하며 난에 실패했습니다. 이를 조흠의 변이라고 합니다.
한편 영락제가 이전에 5번이나 대대적인 군사적 원정을 실시하여 몽골족들을 만리장성 너머로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라트 족과 몽골인들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까지 끊임없이 명나라의 부를 노려 국경내부로 침입하였습니다. 이런 일에도 불구하고 영락제 이후 암군들이 연이어 등장한 명나라는 딱히 이들을 제지할 힘이 없었으며 할 의도도 힘도 없었기에 백성들의 고통은 늘어만 갔습니다. 게다가 만리장성은 이때 딱히 방어적인 용도로는 쓰이지 못했고 기껏해야 야만족들의 침입을 수도에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리는 용도로 가장 많이 쓰였습니다.
16세기에 들어서 왜구가 중국인 밀교역상인과 연대하여 활동을 시작해 해안 지역을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왜구는 한 번에 200여 척이 넘는 함대를 이끌고 오는 등 이미 단순한 해적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골칫거리가 되어 있었으며 그 무장도 상당하여 중국 해안 지방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였습니다. 게다가 몽골에서는 쿠빌라이 칸의 자손이라고 칭한 다얀 칸이 즉위하여 오이라트에 대항해 몽골의 재통일을 이룩하며 명나라 북부의 안정을 위협했습니다. 오르도스 지방에 분봉된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은 16세기 중기부터 빈번하게 중국에 침입하여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시대 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몽골을 가리켜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불리웠습니다.
<명의 쇠락기>
만력제의 치세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에 지원군을 보낸 명나라는 이때문에 엄청난 재정 적자에 시달렸습니다. 게다가 이때 명나라의 황제는 역사상 최악의 혼군으로 평가받는 만력제였는데, 만력제의 무능과 정치 방기가 계속되며 명나라는 갈수록 수렁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만력제는 초기에는 유능한 조언자들과 실무진들을 거느리며 열정적으로 국사에 임하려 하였습니다. 그의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장거정은 효과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국정을 신속하게 처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장거정이 죽자 그만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고 관료들은 서로 뭉쳐 소모적인 논쟁이나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장거정이 죽은 이후 만력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관료들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에 지쳐 아예 국정을 방치하는 수준으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금성의 벽 뒤에 갇혀 살았으며 거의 신하들을 만나지 않으며 태업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관리들은 정국 주도권을 잃어갔고 그나마 황제의 얼굴이나마 볼 수 있었던 환관들이 점차 정국을 좌지우지학 시작했습니다. 국사를 논하고 싶어하는 모든 고관들은 환관을 통하여 황제의 뜻을 전해들어야 했으며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에 명나라는 점차 파탄으로 치달았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유교 학자 집단인 동림당의 당쟁, 국본쟁과 만력태정 등의 문제가 발생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만력삼대정과 만주지역에서 후금이 흥기하는 등의 대대적인 문제가 터지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만력제 시기에 명나라가 완전한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간주됩니다.
<태창제, 천계제의 치세>
1620년 만력제 사후 그의 장자 주상락(朱常洛)이 등극하여 광종 태창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희종 천계제가 즉위하였습니다. 천계제는 즉위 초기 유교 학자 출신의 동림당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으나 당쟁이 격렬해지자 천계제 역시 정사에 뜻을 잃었습니다.
그 기회를 틈타 총애받는 환관 위충현이 영향력을 확대하였습니다. 동림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위충현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이들은 정적으로부터 엄당(閹黨)이라고 불렸습니다. 1624년 엄당이 내각을 차지하였고 위충현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위충현은 동림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1625년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수많은 동림당 인사가 투옥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정부의 행정 기능이 약화되었고 각지에서 민변이 발생하였으며 후금과 몽골이 변경을 위협하였습니다. 위충현은 황제의 무덤을 지을 돈을 빼돌려 그를 기리기 위한 사원을 짓는 등의 패악을 부렸으며 그의 가족들은 온갖 관직들을 독점하며 부정부패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1627년 천계제가 중병이 들자 그의 동생 주유검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마지막 황제 숭정제입니다.
<명나라의 마지막황제 숭정제의 치세>
숭정제가 즉위한 이후 숭정제는 곧바로 위충현의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 내외의 폐단을 혁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숭정제가 의도한 개혁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1629년 만주에서 세력을 키운 만주족의 지도자 홍타이지가 장성을 돌파하여 북경까지 이르게 되자 숭정제는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나마 명나라에 남아있던 마지막 명장 원숭환을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이는 결국 명나라의 몇 남지 않는 군력마저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홍타이지는 그 이후에도 6차례에 걸쳐 장성을 돌파하였으며 직예와 산동 지역을 유린하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직예 지역은 전란이 그치지 않고 전염병이 횡행하였기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였습니다. 동북지역의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청나라의 군대가 장성을 압박하였습니다. 마침내 1640년 청나라가 금주(錦州) 등 지역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주력 군대를 격파하였습니다. 홍타이지는 명나라의 주요 장수인 홍승주(洪承疇) 등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에 명나라의 전선은 산해관(山海關)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이 때 산해관을 지키던 장수가 바로 오삼계였습니다. 이 시기에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 이자성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으로 하고 북경으로 진격하였습니다.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시키자 숭정제가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고 이를 공식적으로 명나라의 멸망으로 봅니다. 한 편 산해관의 오삼계는 수도가 반란군에게 포위되었고 황제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로 진군하였는데 진군 도중 숭정제의 부인과 모친 그리고 친척들이 만주족에 의해 강간되거나 살해되어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결국 청나라와 힘을 합쳐 명나라 멸망에 앞장서게 됩니다. 남아있는 명나라의 황족고 관료들이 남경에서 남명을 세우고 청나라에 계속 저항했습니다.
명말청초의 변혁기 속에서 일부 한족들을 앞서 언급한 바 정씨 왕국이 지배하는 대만으로 가기도 하고 다른 부류는 조선으로 또 다른 부류는 일본의 나가사키로 이주하였습니다. 이들은 에도 막부가 지정해주는 장소에 모여 살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의 기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