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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宋) 1

by cpark240 2023. 5. 18.

<개요> 송(宋, 960년 ~ 1279년)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의 후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개봉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추시대 송, 남북조 시대 송을 구별하고자 황실의 성씨를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릅니다. 당나라가 절도사들으ㅢ 분열로 약화되고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고 요나라가 화북을 점령하자 한족들이 남쪽으로 밀려나가 송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송나라 이후 요나라와 서하, 북쪽에 있는 금나라와 패권을 다투며 끊임없는 갈등을 겪습니다. 결국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에 의하여 멸망하였습니다.

 

송나라 이 시기에 화약이 사용되었으나 실용적으로 사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나침반을 사용하여 정북의 방향을 정확히 알아낼 정도였습니다. 송나라는 과학 기술이 발달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종교적이고 유교적인 면 때문에 실용학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원나라 때 실용학이 중시되어 화약이 크게 발달하였고 명나라 또한 유교적인 면으로 실용학이 발달하지 못했으며 청나라에 다시 실용학으로 과학이 발달하였습니다.

 

송나라는 크게 북송과 남송, 이 2개의 시기로 나뉜다. 북송(北宋) 시기는 960년부터 1127년까지인데 이 시기에 송나라의 수도는 개봉(開封)에 있었으며 한족들이 중국 남쪽으로 밀려나 건국하였습니다. 허나 1127년 이후에는 요나라에 지속적으로 침략받았고 요나라에 조공하영 경제적으로 약해졌습니다. 이 후 여진족이 이끄는 금나라에 밀려 북송 영토를 잃고 남쪽으로 쫓겨 내려가 임안(臨安-지금의 항저우)로 도읍을 옮기는데 이 때부터의 시기를 남송(南宋)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 시기 한족들은 양쯔강 남쪽으로 도망쳐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황하를 포함한 중원 지방은 금나라에 의해 잃었으나 어느정도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강남 지방의 거대한 인구와 생산력 높은 농지들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1234년 송나라 북쪽에 있었던 금나라는 몽골족에 의하여 멸망당했습니다. 이후 중국 북부는 몽골이 장악했으며 몽골은 중국 남부의 송나라까지 정복하려고 하며 송나라를 자주 침략하였고 송나라와의 불안정한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몽골 제국의 4대 대칸인 몽케 칸이 1259년에 충칭을 공략하다 사망하자 그의 아우였던 쿠빌라이 칸이 새로운 대칸으로 즉위하였습니다. 1274년에 쿠빌라이 칸은 자신을 중국의 황제로 선포하였으며 원나라를 개창했습니다. 약 20여 년간의 송나라는 몽골군에 침략되었는데 1279년에 쿠빌라이 칸은 애산 전투에서 승리하며 결국 송나라를 멸망시키는데에 성공하였으며 이 후 원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송대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매우 역동적이었습니다. 한족 국가인 송나라는 과학이나 문화가 발달되었다고 자주 과대평가받지만 유교적 종교적인 면때문에 실용적인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몽골제국에 정복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몽골제국에 들어서 화약 등 실용적인 과학이 발달하게 되었고 정이와 주희 같은 대철학자들이 불교의 개념을 섞어 유교의 틀을 다잡았으며 고전들을 새롭게 엮어 성리학의 핵심 개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된 과거제는 송나라 시기에 더욱 그 역할이 커졌고 이 과거제에 합격하여 임용된 능력있는 관리들은 점차 세습 귀족들을 몰아내고 조정을 관료제적인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습니다.

 

 

- 북송(北宋)

1111년의 북송

송나라는 후주(後周)의 전전도점검(殿前都点檢: 근위군 대장)이었던 조광윤(태조)이 960년에 후주 최후의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습니다. 거란족이 북쪽에서 발흥하여 송나라를 계속 침략하였고 거란에 의해 오대십국 시대가 끝나게 되었고 송나라 태조는 거란에게서 화북 대부분을 잃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개봉에 수도를 잡았습니다. 이 시기부터를 북송 시대의 시작으로 봅니다. 과거제를 중시하여 행정적인 안정성을 꾀했고 관리들을 세습 대신 능력 중심의 시험을 통하여 주로 뽑고자 했습니다. 이 때에 장사훈(張思訓)이 태평혼의(太平渾儀)와 같은 시계들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태조는 이후 병사하여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태종이 황위에 올랐습니다.

 

송나라 조정은 요나라에 대한 침입을 계속 받으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인도의 촐라 왕국,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중앙아시아의 카라한 칸국, 한반도의 고려, 일본 등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왕조 교체기 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송나라는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과는 딱히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태조의 치세 때에 송나라는 북동쪽 국경을 접한 요나라와 북서쪽에 있는 서하를 어떻게 다룰 지에 대한 기본 방침을 정했는데, 이 기본 방침이라는 것이 전쟁과 유화술을 동시에 병행한다는 내용이였습니다.

 

요나라의 지속적인 압박을 받아 송나라는 군을 어쩔 수 없이 동원하여 서하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라를 공격, 938년 이래 요나라의 영토였던 연운 16주를 잠깐 되찾았지만 하지만 곧이어 요나라의 군대가 밀려들어와 연운 16주를 금방 잃게 되었고 요나라 거란군이 1005년까지 지속적으로 송나라의 북쪽 국경을 넘나들며 침략하고 약탈하였습니다. 이후 송나라는 굴욕적인 전연의 맹을 맺고 난 이후에야 요나라는 침략을 멈추었습니다. 이 전연의 맹 이후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게 되었고 송나라는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송나라는 한편 북서쪽의 서하의 침략에도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11세기 초, 송나라 심괄의 지휘 하에 서하를 상대로 몇몇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허나 이 승리는 심괄과 그 부하들 간에 불화가 일어나면서 빛이 바랬고 다시 서하에게 송나라 영토가  점령되었습니다. 서하는 송나라 수도까지 쳐들어 오게 되었고 이후 송나라는 또다시 금나라 때와 같이 서하와 굴욕적인 평화조약 경력화약(慶曆和約)을 맺었고 서하에게 조공과 공물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1075년과 1077년 사이에는 베트남의 리 왕조와도 국경 분쟁을 벌였고 송나라는 이 전쟁으로 광시성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송나라는 리 왕조와 지속적으로 다투었고 결국 베트남고 송나라 모두 막대한 타격을 입자 평화 조약을 맺는 것으로 전쟁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11세기, 조정은 서로 파벌이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송나라의 복잡한 사회와 경제를 어떻게 관리 할 것인지를 주제로 두고 싸웠으나 실제로는 그저 권력 다툼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상주의자였던 범중엄이 재상에 올랐고,

그가 관리 임용 방식, 하급 관리들의 수입, 고등 교육 후원 제도의 확충 등을 통하여 개혁을 진행하려 하자 거센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범중엄은 재상직에서 쫓겨났고 그의 뒤를 이어 왕안석이 새 재상에 올랐습니다. 6대 황제였던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왕안석은 현재의 부패한 관료제와 교육 제도를 신랄히 비판했고, 송나라 조정에 만연한 부패와 방치, 무관심을 없애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개혁적인 법들을 대거 만들었고 이를 왕안석의 신법(新法)이라 불렀습니다. 왕안석의 신법은 주로 영세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했습니다. 또한 지세를 개혁하여 세법을 개정하고 정부가 몇몇 상품을 독점하여 이에서 세금을 걷으며 과거제의 기준을 상향시켜 더욱 실력있는 관료들이 임용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법은 조정을 반으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왕안석의 신법을 지지하는 자들은 '신법파'로 불렸고 이를 반대하는 보수 세력들은 '구법파'라고 불렸습니다. 구법파는 사마광이 이끌었으며 모든 정치 문제에서 첨예하게 갈들했고 서로의 파벌에 속한 사람이면 아무나 가리지 않고 처형하거나 귀양 보내버리기에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이 때 유명한 시인이자 관리였던 소동파도 왕안석의 개혁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야만 했습니다.

 

송나라 중앙 조정은 반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던 와중, 송 외부 사정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만주 지역에서 요나라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들이 1115년에 금나라를 세웠고 요나라에 맞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송나라의 관리들은 굴욕적인 요나라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휘종에게 금나라와 연합을 맺어 함께 요나라를 치자고 설득했고 이들은 해상의 맹약을 맺어 요나라를 무너뜨릴 때까지 서로 연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요나라는 결국 1125년에 멸망했고  한 편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킨 이후에도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문치주의에 기반한 송나라의 군사적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고 결국 점차점차 송나라를 침략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가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은 사실이 드러났고 이는 금나라의 분노를 사서 결국 전쟁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금나라의 여진족 군대는 빠르게 남진하여 송나라 이곳 저곳을 정복하였고 결국 1127년 개봉이 공격당해 함락되고 황제 흠종, 태상황(太上皇) 휘종과 그 딸들을 기방으로 보냈고 조정 대신들 대다수를 북쪽으로 사로 잡아 갔습니다(정강의 변).


남아있는 송나라 군대는 흠종의 동생이었던 강왕(康王) 조구(趙構)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조구는 스스로 고종으로 즉위하였고 양쯔 강 이남으로 후퇴하여 임안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습니다. 이 시기 이후의 송나라를 남송이라고 부릅니다. 금나라에게 패배한 이후, 송나라는 중국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고 금나라는 중원을 차지한 자신들을 정통 중국 왕조라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금나라는 이후 5대 원소들 중 흙을 자신들의 상징 원소로 황실의 색으로 채택했습니다. 이는 송나라의 상징 원소였던 불 다음에 오는 원소가 흙이었기에 금나라가 송을 제치고 중국을 지배하는 정통 왕조라고 여기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