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송(南宋)
송나라는 중원 지역을 잃고 양쯔 강 이남으로 밀려내려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금나라에 맞섰습니다. 금나라 군대는 세를 몰아 임안까지 점령하며 고종을 피난가게까지 만들었으나 다잇 남송에는 악비나 한세충과 같은 명장들이 있어 금나라를 성공적으로 막아내었으며 금나라 군대를 다시 양쯔 강 전선 이북으로 밀어올렸습니다. 조정은 조선 기술을 장려, 수많은 군선들을 건조하여 해군력을 강화하는 한편, 항구도 개축하였으며 등대도 세워 해양력을 강력히 하였습니다. 이 때 광저우, 취안저우, 샤먼 등에 있는 항구가 크게 정비되었습니다. 이는 군선들의 기지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상선들도 활발히 사용하여 남송 시대의 해양 무역을 촉진시키는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이렇듯 남송은 처음에는 금나라를 상대로 맹렬히 싸웠으나 진회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었으며 악비는 살해되었습니다. 진회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이 침공을 개시했으나 금나라의 황족 완안옹이 반란을 일으켜 해릉왕은 죽고 완안옹은 금나라의 세종으로 즉위하여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습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영 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신(趙愼)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었습니다.
송나라가 해양력을 정비하고 해상 무역을 장려하자 점차 송나라의 해상 교역략은 늘어났습니다. 송나라 상인들은 바다 곳곳을 누비며 물건들을 싣고 오고갔고 송나라의 경제력도 함께 부강해졌습니다. 한편 이렇게 상선들이 많이 오고가자 해적들도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송나라는 이를 막기 위하여 상시적인 해군의 필요성을 인지했고 결국 1132년에 처음으로 상설 해군을 창설하여 본부를 딩하이구에 두었습니다. 송은 이 해군을 이용하여 1161년에 양쯔 강에서 금나라 해군을 꺾었으며 이 전투들에서 송나라가 개발한 과학기술을 적용한 무기들을 대거 사용하였습니다. 이 전투들에 사용된 무기들에는 화약 폭탄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금나라 해군은 해릉양왕이 직접 이끌었고 600척이 넘는 군선에 7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고 송나라 해군은 120여 척의 배에 3천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허나 송나라 해군은 화약의 압도적인 힘과 빠른 게릴라 전술들을 효과적으로 사용 금나라 해군을 꺾는 데에 성공했고 이후 이에 고무된 송나라 조정은 계속적으로 해군력을 증강시켜나갔습니다. 이 전투 후 100여 년이 지나자 송나라는 5만 2천 여 명에 달하는 해군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효종시대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 : 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침체되어 있던 강남 경제의 활성화 등 여러가지 개력을 추진하였습니다. 송나라는 세입을 늘리기 위하여 부유한 지주들의 토지를 압수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세원을 다양화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조치는 지주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으나 조정의 의지가 워낙 강력하여 이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하여더 이 지주들은 중앙의 관리들과 결탁하여 세금을 탈세하고 특권을 누리며 송나라의 재정을 극도로 악와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광종이 되었으나 한탁주 등 반대파들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했으며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반대파들을 대거 숙청하였습니다. 이 시기 주희의 주자학도 거짓학문이라고 탄압받았습니다.
금나라 북쪽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전세계를 재패했던 몽골인들로 당시에는 칭기즈 칸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칭기즈 칸은 1205년 부터 점차 금나라를 공략하기 시작했고 1211년에는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고갔습니다. 이렇게 금나라가 무너져가는 것을 본 한탁주는 개희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결국 1207년 금나라의 요청으로 한탁주는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다시 화의를 맺었습니다. 금나라는 이렇게 송나라를 상대로는 강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으나 떠오르는 태양인 몽골족들에게는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1211년에 몽골이 내륙지대 깊숙히 들어와 엄청난 약탈과 파괴를 일삼자 결국 금나라는 항복 할 수 밖에 없었고 몽골족의 봉신으로서 매년 공물을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금나라가 북쪽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하여 수도를 베이징에서 개봉으로 천도했을 때 몽골인들은 이를 반란으로 여겼습니다. 1233년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 군대가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점령하였습니다.
금나라가 망한 후, 송나라군은 북상하여 낙양과 개봉을 회복하였으나 이것은 송나라가 더이상 북쪽으로 올라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몽골과의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기에 몽골고 남송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235년 2월 몽골의 쿠릴타이에서 남송에 대한 전쟁 선포를 결의하였고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물밀듯이 밀려와 남송의 영토 상당수를 장악하였습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당시 송나라의 명장 맹공 때문이었는데 맹공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몽골군을 연전연패시켰으며 양양 일대를 수복하고 사천 일대를 다시 송나라의 영토로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이 때에 중원에서 수많은 한족들이 송나라로 피난을 왔는데 맹공은 이들을 활용하여 군대를 늘리고 대몽골 방어선을 단단히 하였습니다.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죽자 몽골은 새 대칸을 뽑기 위하여 잠시 후퇴하였고 시간을 번 송나라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방어선을 단단히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남송은 맹공의 주도로 사천 지방에만 10여 개의 성을 새로 쌓았으며 특히 양양 지역 등 천혜의 요새들을 강화하고 이들을 이어 쉽게 무너지지 않을 난공불락으로 변모시켰습니다.
몽케 칸은 다시 군대를 나누어 대대적인 침공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몽골의 대칸이었던 몽케 칸은 이미 1253년에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운남의 대대적인 침공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몽골의 대칸이었던 몽케 칸은 이미 1253년에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운남의 대리구글 점령하여 남송을 포위 공격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 공격으로 남송을 멸망시킬 작정을 했습니다.
몽케 본인이 이끄는 주력은 사천, 동생 쿠빌라이는 악주(오늘날의 호북성 무한시), 다른 별동대는 운남에서 담주(오늘날의 호남성 장사시)로 치고 들어갔습니다. 몽케는 사천의 성도를 공략하고 곧이어 사천 합주 조어성(오늘날의 사천성 중경시)를 공격했습니다. 사천의 다른 지역이 겁을 먹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던 것과 달리 남송의 명장이자 맹공의 부장이었던 왕견은 주민 10만과 결사 항전을 주장하여 저항했고 몽케 칸 5개월 동안 공성전을 펼치다가 철통 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 진영에 돈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 조어성 전투는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후 몽케 칸이 죽자 새로운 대칸을 뽑기 위하여 쿠릴타이가 열렸고, 이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방에서 유럽을 공략하고 있던 몽골군이 동쪽으로 후퇴하였던 것입니다.
몽케 칸이 죽은 직후 송나라에서는 전쟁 영웅을 자칭했던 간신 가사도가 재상직에 올랐고, 가사도가 송나라의 군력을 깎아먹으며 송나라는 점차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한편 몽골의 쿠릴타이에서 몽케 칸의 동생 쿠빌라이가 칸에 올랐고 쿠빌라이는 10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남송의 핵심적인 요충지였던 양양을 공격하였습니다. 송나라 군대는 양양에서 끈질기게 버텼으나 몽골 군대가 보급로를 끊고 지원군도 차단하며 결국 고성 6년만인 1274년 3월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쿠빌라이가 양양을 함락하자 몽골 군대는 거침없이 남쪽으로 진군했습니다. 당시 몽골 군을 이끌던 장군 바얀은 끊임없이 송나라 장군들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몽골레 항복한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송나라 수군의 결사 항전에 바얀의 군대도 상당히 고전했으나 작전을 바꿔 철기병을 멀리 우회해 따로 상륙시켜 후방에서 적을 동요케하자 심리적으로 흔들린 송나라 수군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같은 해 6월엔 몽골군이 강주를 함락시켰으며 이에 남송은 대군으로 맞서보려 했으나, 두 번의 누란지세를 이겨낸 명장 맹공과 왕견 같은 장수는 더 이상 없었고 이 군세를 이끈 건 간신 기사도였습니다. 결국 이 군대마저 괴멸되어 가사도가 죽은 뒤엔 남송의 운명은 정해졌고 1276년엔 수도 임안마저 함락되었습니다.
임안이 함락된 이후, 송나라 조정은 망명정부 형태로 간신히 존속해 나갔으며 마지막 재상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했습니다. 이때 양진이라는 인물이 "내가 저들의 진영에 가서 시간을 벌겠다" 며 기지를 발휘해 몽골 군대에 사로잡히면서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인물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피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후의 보루였던 푸저우까지 몽골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송나라 조정은 홍콩 근처까지 도주해서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고 이 와중에 문천상은 몽골군에게 사로 잡혔습니다. 그리하여 홍콩 광주만의 애산(厓山)에서 소략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세력은 군.민을 합쳐 모두 20만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결국 송나라는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쿠빌라이 칸이 이끈 몽골 군대에게 완전히 패배하면서 송 태조 조광윤가문과 시씨 가문은 끌려가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멸망합니다. 당시 마지막 송의 군대는 육군은 내륙, 나머지 해군은 800척 정도의 전함에 머물며 최후의 대결을 준비했고 백성들과 관료 황족들은 몽골 지배하엔 살지 않겠다고 하여 수십 만 명이 그나마 안전한 바닷배에 있었습니다. 함대전으로 펼쳐진 애산 전투의 초반은 송나라의 장세걸이 이끄는 함대가 유리해보였지만 몽골 군대를 이끌던 장수 장홍범은 물러나서 풍악을 올리며 쉬는 척을 하더니 이내 포위전을 개시했습니다. 포위당한 송나라 병사들은 먹을게 없어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하며 버텼으나 결국 완전히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수백 척이나 되는 함선이 가라앉았고 수만 명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 때 이미 포로로 잡혔던 문천상도 몽골 군영 내에 있었는데 남은 송나라군에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내라고 장홍범이 종용했으나 그는 끝까지 거부했고, 문천상의 충심에 감복한 장홍범도 결국 더 이상 그런 요구를 하자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 육수부는 완전히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7살이 된 황제 소제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송나라 군대가 패하고 모든 것이 확정되자 어린 황제와 함께 같이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황제의 어머니인 양 태후는 패전의 대혼돈 속서 구출되었으나 몽골군에 의해 끌려 갔습니다. 이렇게 7살의 마지막 황제와 황족들 신하들이 다 바다에 빠져 자살하였습니다. 몽골 기록에 다음날 떠오른 시체만 10만 구였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송나라 함대를 이끌었던 장세걸은 다음 기회를 노리기 위하여 남은 군선들을 추슬러 먼 바다로 떠나려 하였으나, 때마침 태풍이 불어닥치며 장세걸과 그를 따르던 부하들은 결국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남쪽에 세워진 한족의 최후의 보루였던 송나라는 1279년 30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