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나라
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 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이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몽골어로는 다이 온 이케 몽골 울루스(DaI-on Yeke Mongyol Ulus) 즉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입니다. 원나라는 몽골 제국의 직계 국가이며 중국의 경우 한족들은 몽골제국에 대해 한자로 기록하였습니다.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쿠빌라이의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통솔력은 쇠퇴합니다. 원나라가 성립 된 전후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오고타이의 후손인 하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등 칸의 권위가 크게 변화하면서 몽골 제국은 재편의 과정에 들어섭니다. 이러한 과정 끝에 원나라는 몽골 제국 중 쿠빌라이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대칸의 직접지배가 미치는 영역으로 사실상 한정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쿠빌라이 가문의 세습령(울루스)이 되었습니다. 민족을 4등급으로 나누어 한족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습니다.
중국 학자 신력건에 의하면 당시 몽골 원나라는 이전 동아시아에는 퍼지지 않았던 후기 불교이면 성적 샤크라를 중시하는 티베트의 라마교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원나라에 있는 모든 몽골인들은 샤크라 라마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몽골 군인 1명 당 100명의 한족들이 배당되어 한족들이 칼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감시하였고 라마교를 핑계로 한족여성들은 몽골 군인들에게 초야권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한족들은 첫째 아이는 살해하는 풍습까지 생겼습니다. 이런 초야권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원나라에서의 기록에만 보여지는 특수한 문화로 동아시아에서는 한족에게만 가해지는 지배 방법이였습니다.
원나라 건국 당시 쿠빌라이의 세력은 몽골 고원과 기존 금나라가 점유하던 화북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장강 이남에 버티고 있던 남송은 원나라가 공격을 하여 조공을 하고 있던 상태였지만 원나라를 위협 할 만 한 군사력도 갖춘 터라 남송을 그대로 두는 경우 원나라의 지배가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미 몽케 칸의 대에, 남송의 재상인 가사도(賈似道)에게 실패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습니다. 쿠빌라이는 군을 몰아 후난성과 장시성을 유린하였고 남송은 허페이 지역과 항저우에서 대몽항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3번의 원정을 통해 항저우까지 함락시키고 남송에 남은 것은 수도와 항저우 지역뿐이였습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 파나카티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켜 남송의 도시들을 차례로 유린하였습니다.
쿠빌라이는 남송에 수차례 원정 정벌을 하여 남송과의 전쟁은 수십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몽골인들과 여진족 등은 남송 도시들을 지속적으로 약탈하고 유린하였고 남송은 그때마다 쿠빌라이와 협정하여 조공을 보냈으나 남송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남송의 여러 도시들이 정복되어 함락되었고 남의 한족들은 강이민족 몽골을 몽고라고 폄하하며 저항을 했으나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원나라는 군인이 각 성고 도시에서 약탈, 방화를 저질렀고 특히 항주의 피해는 심각했습니다.
1274년 쿠빌라이는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 1276년 수도 임안(臨安: 항주)이 함락되어 남송군이 전멸되었습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지역의 명칭을 모두 개편하였고 남송이 있던 지역을 모두 성(省)으로 나눠 행성을 설치하고 몽골인 통치자들을 보내 각 행성을 통치하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중국은 각 지역을 성(省)으로 나누어 불렀습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소의 황족은 사로잡혀 원나라의 수도로 연행되었고 황족의 여성들은 기생관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남송의 귀족들은 이민족을 섬길 수 없다며 저항하다 죽었습니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쿠빌라이는 원정 정벌하였고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쿠빌라이는 투항한 한족들은 어느 정도 벼슬을 주었지만 대부분의 한족들은 이민족이였던 몽골군에 투항하지 않고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전락하였습니다. 몽골인들은 한족들의 토지를 빼앗아 거대한 농장들을 만들었고 한족들은 재산을 빼았겨 흩어졌습니다. 몽골인들은 계급을 4단계로 나누어 1단계 계급은 몽골인고 색목인, 2단계 계급은 부마국 고려인과 투항한 여진족과 거란족, 3단계는 복속된 화북 한족 그리고 4단계 최하층은 남송인으로 나누었습니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구 남송 지역의 부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습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고 그의 치세 때안 1301년 하이두가 죽자 1304년 긴 시간 동안 원나라와 항쟁을 벌였던 서쪽 여러 칸과의 화의가 성립되었습니다. 이 동서 울루스의 융화로 인해 몽골 제국은 대칸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연합으로 다시 묶어지는 동시에 실크로드 교역의 호황이 찾아왔습니다. 이 상황을 가리켜 팍스 몽골이카(Pax Mongolica: 몽골의 평화)라고 불리었습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베이징)는 정치 경제의 센터가 되어 마르코폴로 등 수많은 서방의 여행자가 방문하고 그 번영은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강남의 항만도시에서는 해상무역이 융성하였고 일본 원정을 통해 국교가 단절되었던 일본에서도 사적인 무역선 및 유학승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어느 정도 교류가 지속되었습니다.
몽골은 남송을 정벌했으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일본 공격에 실패하여 많은 몽골인들이 죽자 원나라는 이번엔 복속된 남송인들을 일본으로 보내 1281년 다시 일본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태풍과 가카쿠라 막부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을 침공했지만 쩐 왕조에게 차례로 패배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가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습니다. 남송을 배신하고 투항한 한족들은 그만한 대우를 원했지만 몽골인들의 지배는 가혹하였고
한족들은 빈번히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군들은 모두 평정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한족들의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습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패배로 끝났습니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로의 개척에 뜻을 둔 경구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 할 수 있었습니다. 1307년 테무르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 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연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모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 다툼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또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칭기즈 칸의 황후 보르테, 쿠빌라이의 황후 차브이, 테무르의 모친 코코진 등의 출신부족에서 쿠빌라이, 테무르의 2대에 걸쳐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던 옹기라트부를 중심으로 결속된 원나라의 궁정귀족들이었습니다. 테무르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테무르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맞이했으나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과 아난다를 살해하고 몽골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테무르의 조카 카이산을 황제로 맞이했습니다.
카이산의 사후는 동생 아유르바르와다가 제위를 이었으나 그의 치세는 대대로 옹기라트씨 출신의 황후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였던 곤기라트부 출신의 아유르바르와다의 어머니 다기 카톤이 궁정내의 권력을 장악하여 칸의 명령보다도 모후의 명령이 더 권위를 가질 정도라고 이야기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비교적 안정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치세가 1320년에 끝나고 1322년에 다기가 죽자 다시 정쟁이 재연되었습니다. 다음해 1323년 아유르바르와다의 뒤를 계승한 시데바라가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은 뒤부터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 할 때까지 13년간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하는 이상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겨우 제위가 안정된 것은 다수의 황족이 황위를 둘러싼 항쟁에 의해 쓰러지 끝에 광서에서 추방생활을 보내던 토곤 테무르의 즉위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토곤 테무르는 이 시기 권력을 장악하던 태평왕(太平王) 엘 테무르에게 묶여있어 엘 테무르가 병사 할때까지 정식으로 즉위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에르 테무르의 사후에는 아스트 친위군 사령관인 바얀이 엘 테무르의 유아를 살해라고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고 1340년에는 바얀의 조카 토구다가 백부를 쿠데타로 살해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등 원나라의 궁정은 거의 군벌의 내부항쟁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성인이 된 칸도 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더해져 1347년부터 1349년까지 토구다가 추방당하는 등 중앙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이 정치혼란 속에서 어느덧 유럽에 유행하던 흑사병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던 전염병이 중국에 유행하였고 차례로 천재지변이 농촌을 황폐화 시켰습니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권력 다툼에 마음을 빼앗긴 권력자들은 이에 대한 유효한 대책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는 급속히 황폐화되고 원나라의 지배에 대한 한족들의 불만고 공업중시의 원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경제착취에 괴로워하던 농민의 궁핍 등이 원인이 되어 지방에서는 급속히 불온한 움직임이 높아져만 갔습니다.
1348년 절강의 방국진(方國珍)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습니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꾼 토크토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원한 토곤 테무르에 의해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대칸의 권력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이 때 홍건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화남을 통일해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