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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淸) 1

by cpark240 2023. 5. 22.

- 청나라(淸) (1636년 4월~1912년 2월 12일)

청나라 국기

<건국>

 

만주족의 명나라 정벌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은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에 의하여 건국되었습니다. 누르하치는 군소 여진족들의 수장입니다.

 

누르하치는 이후 명나라의 명령 하에 주변의 여진 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불화들을 잠재우는 데에 뛰어난 능역을 보여주었고 이후 1616년 즈음이 되자 모든 인근 여진족들을 통합하며 만리장성 외부 진족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떠올랐습니다.

기세 등등해진 누르하치는 예전에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대금으로 정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정한 후 스스로를 총영명한(聰英明汗) 간단히 말하여 여진족의 대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2년후, 누르하치는 칠대한을 선포했고 여전히 자신의 지배권 밖에 있었던 여진족들까지 모두 통일하기 위하여 명나라의 통치를 거부한 뒤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안팎으로 무너져가던 명나라 군대는 속절없이 누르하치에게 패배했고, 누르하치는 자신의 수도를 헤투 알라에서 명나라에게서 뺏은 도시들로 천도하였습니다. 또한 한족들을 노비로 만들어 만주족들에게 분배하였습니다.

 

1621년에는 라오양으로 1625년에는 선양으로 옮겨갔습니다. 여진족들이 누르하치의 지도 하에 모두 통일되자 누르하치는 군사, 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이후 누르하치는 새롭게 부족들을 편성하여 새로운 만주 부족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누르하치의 조정을 랴오둥 반도의 도시들로 옮긴 것은 만주족이 인근 부족들과 더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이 곳에서 몽골 평원들에 있는 몽골린들고 자유롭게 연락 할 수 있었고 그 외의 명나라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들과도 점차 연계를 넓혀갔습니다. 다만 당시 몽골족들은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져 서로를 적대하는 세력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명나라의 압제에 대항하는 마음만은 똑같았기에 누르하치가 이들에게 명나라에 적대적인 공동 전선을 제안하였을 때는 모두가 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몽골인들은 전쟁에서도 유용한 동맹이었습니다. 몽골인들은 여진족들에게 말 위에서 화살을 쏘는 등 기마술과 궁술들을 전파하였고 말과 갑주들을 제공하며 귀중한 인적 자원이 되어주었습니다.


누르하치가 남긴 업적들 중 가장 눈여겨 볼만한 것은 바로 만주 문자입니다. 구 여진 문자는 이미 소실되었기에 몽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문자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누르하치는 팔기제를 확립하여 이후 청나라까지 이어지는 핵심 제도들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당시 여진족은 한족들과 숫자가 비슷했으며 한족들의 백성들을 빼았고 한족들의 귀족 지위를 강들시켜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몽골인들과 합쳐 동맹을 맺으며 점차 세를 불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족들의 저항은 거셌지만 만주족과 몽골족들은 기세를 몰아 한족들을 학살하였습니다. 당시 귀족들만이 한족을 내세울 수 있었고 평민으로 강등된 한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성씨도 한족도 아닌 명나라 중국인들이였습니다.  만주족들은 저항하는 한족들을 죽이고 노비로 강등시켰고 만주족에 충성하는 한족들은 어느 정도 등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주족의 명나라 공략>

 

누르하치의 무패 기록은 1626년 1월, 그가 니위안현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명나라의 명장 원숭환에게 패하며 그 막을 내렸습니다. 누르하치는 이후 몇 달 후 승하했고 그릐 여덟 번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자식들 간에 벌어진 치열한 왕좌 쟁탈전을 뚫고 그의 뒤을 이었습니다.

 

홍타이지는 유능한 군사 사령관이었고 이미 팔기제의 여덟 군단들 중 2개의 군단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집권 초기에는 연달아 군사적인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여진족은 1627년에도 또다시 한족 원숭환에게 패배의 쓴맛을 맛보았습니다. 다만 이는 명나라가 서양에서 수입해온 포르투갈 산 대포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기술적,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홍타이지는 1634년에 기술자들을 포섭하여 유럽식 대포들을 다룰 줄 아는 새로운 포병을 창설했습니다. 홍타이지의 재위기에는 점차 여진족들이 스스로를 '만주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홍타이지는 1635년 11월에 공식적으로 '만주족'의 통합을 선포하여 분열되어 살던 여진족들에게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심어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이후 산해관 이북 지역을 모두 명나라에게서 빼앗아 왔고 내몽골의 링단 칸을 완전히 굴복시켰습니다. 1636년 4월 내몽골의 몽골 귀족들, 만주 귀족들은 선양에 모여 쿠릴타이를 열었고 후금의 칸을 새로운 청나라의 천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극심히 저항하는 명나라 한족들은 죽였습니다. 이 때 구 원나라의 옥새가 홍타이지에게 전달되었으며 특히 몽골의 구 저항 세력들이 모두 만주족에게 무릎을 꿇으며 청나라는 이때부터 원나라의 후예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홍타이지는 스스로를 칸에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로 격을 높였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쳤습니다.

1637년에는 명나라에서 투항하는 한족들은 살려두었으나 저항하는 명나라 한족들은 학살하고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홍타이지는 조선인들도 팔기군에 포함시켰습니다. 홍타이지는 명나라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하고 홍타이지가 1640년에서 1642년까지 명나라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명나라의 황제 숭정제가 역모를 의심하고 원숭환 장군을 사형에 처해버리면서 명나라는 갈수록 멸망의 길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이후 명나라는 만리장성 이북 지역을 완전히 포기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