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나라(淸) 2
후금의 명나라 정복
홍타이지는 1643년 9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직후 제대로 된 승계 제도가 없던 만주족들은 귀족 회의를 통하영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했습니다. 당시 홍타이지 사후 가장 유력한 권력자들은 홍타이지의 아들이었던 아이신기오로 호오거와 홍타이지의 이복형제 도르곤이었습니다. 이들은 직접적인 충돌을 꺼려했고, 결국 2명 모두 황위를 포기하며 홍타이지의 5살짜리 아들을 대신 새로운 황제로 뽑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가 바로 청나라의 2대 홍제 순치제입니다. 이후 도르곤은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으로 통치하였고 청나라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했습니다.
그와중에 명나라 조정은 내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에 농민 봉기들이 끊없이 일어나고 고질적인 재정난이 겹치며 끊임없이 흔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만주족들이 승계 도중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전혀 기회를 잡지 못했고 청나라가 스스로를 칭제건원하는 것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1644년 4월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은 이자성이 이끈 반란군에 의하여 무너졌고 이자성은 그 자리에 순 왕조를 세웠습니다. 한 편 마지막 황제였던 숭정제는 반란군을 피하여 자금성에서 목을 메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이징을 점거한 이자성은 20 명에 달하는 반란군을 이끌고 명나라 북부의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주족들은 이 때를 기회로 삼아 이자성이 있는 명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만주족들은 많은 전투에서 이기고 한족들을 살육하였습니다. 만주족들은 1644년 5월 27일 산해관 전투에서 이자성의 반란군들을 꺾었습니다. 만주족 동맹군은 그 해 6월 6일에 베이징을 점령했습니다. 10월 30일에는 순치제가 자금성에서 중국의 공식적인 천자로 선포되었습니다. 이자성의 명나라를 꺾었고 명나라의 잔당들은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도르곤이 장성을 넘어 베이징으로 돌아온 직후, 만주족들은 명나라 숭정제의 후손들을 모아 노비로 삼았습니다. 명나라에 충성을 한다는 고관들은 모두 목을 베어 거리에 시체가 즐비했습니다. 만주족을 섬기는 한족들은 살려주었지만 만주족에게 저항하는 한족들은 모두 살육하였습니다. 청나라는 만주족 지배층이 만든 국가이지 한족들과 협력하여 만든 국가가 아니였습니다. 한족들은 만주족들에게 두려워하며 협력을 강요당했습니다. 만주족 지도층들은 모든 한족들을 만주족화시키고 거부하는 자들은 사형시키는 등 강력한 만주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투항한 한족은 도르곤에게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을 제안하여 치국평천하 할 계책을 알려주었습니다. 십종십부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첫째, 남종여부종(男從女不從) : 남자는 따르되,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즉, 만주족을 따라 체두변발하되 여자는 예전처럼 머리모양을 그래로 한다
- 둘째, 생종사부종(生從死不從) : 살아서는 만주족의 습관에 따르되, 죽은 후에는 따르지 않는다. 즉, 한족의 습관대로 매장을 한다
- 셋째, 양종음부종(陽從陰不從) : 양계(陽界)의 일은 만주족을 따르되, 음계(陰界)의 일은 따르지 않는다. 즉, 내세를 위한 불교등 종교나 습관들은 그대로 둔다.
- 넷째, 관종예부종(官從隸不從) : 관리는 만주족을 따르되, 노비는 따르지 않는다. 즉, 관리들은 만주족의 예법대로 화령을 달고 조주를 매며, 마과를 입으나, 노비들은 옛날과 같이 입고 행동한다.
- 다섯째, 노종소부종(老從少不從) : 성인은 만주족을 따르되, 어린아이는 따르지 않는다. 즉, 아이일때는 한족의 원래 습관그대로 하고, 성인이 된 후에 체두변발등 만주족 습관을 따른다.
- 여섯째, 유종석도부종(儒從釋道不從) : 유가는 만주족을 따르되, 불교/도교는 원래 한족의 습관대로 하고 만주족을 따르지 않는다
- 일곱째, 창종우령부종(娼從優伶不從) : 창기는 만주족을 따르되, 희곡을 하고 노래부르는 자들은 따르지 않는다. 즉, 경극등을 하는 경우에는 한족의 의복과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다.
- 여덟째, 사환종혼인부종(仕宦從婚姻不從) : 관직에 관련된 사항은 만주족을 따르되, 혼인에 관련된 사항은 따르지 않고 한족의 습관대로 한다. 결혼시, 남자는 만주족의 옷을 입되, 여자는 명나라의 복식을 한다.
- 아홉째, 국호종관호부종(國號從官號不從) : 국호는 청나라를 따르되, 관직의 명칭은 명나라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 열째, 역세종문자언어부종(役稅從文字言語不從) : 노역이나 세금은 청나라를 따르되, 문자나 언어는 원래 한족의 것을 그대로 쓴다.
이 십종십부종은 도르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하여 만주족은 그동안 한족들을 노비로 만들거나 살육하며 유린했지만 어느정도 한족을 살려두는 정책을 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자 등 한족의 문화는 어느정도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만주족들은 한자대신 만주어를 사용하였고 중국어는 잘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청나라 만주족들은 저항하는 한족들에게는 철퇴를 내렸고 만주족에 충성하는 한족들만 살려주었습니다. 한족들은 만주족의 풍습이 다르고 유교를 믿는 한족들에게는 부모와 같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변발을 강요당했습니다. 당시 한족들에게 변발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였으며 변발을 강요당한 한족들은 부모를 배반하게 되었고 유교를 버렸다며 자살하는 자들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청나라가 명나라의 나머지 영토를 모조리 차지하는 데에는 이 이후에도 약 17년이나 걸렸는데 이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점령한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한족들의 복명 세력들, 반란군, 참칭자들이 날뛰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명나라의 장군 정성공이 대만 섬으로 도망가 끝까지 청나라에 저항을 하였으며 아예 정씨 왕국을 세워 청나라 조정의 통치를 거부하였습니다. 정씨 왕국은 몇 십년이 흐른 강희제의 통치기에야 완전히 멸망하여 청나라에 정복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산해관 입관 후 이듬 해 남명 정권을 붕괴시키고 명나라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자 전구게 변발령을 선포합니다. 다만 한족 여자, 어린아이, 기생, 속세를 떠난 종교인 등은 제외되었습니다. 청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楊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와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髮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은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과 멸시를 받았는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많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 명이 학살 되었으며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한족이 만주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