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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淸) 3

by cpark240 2023. 5. 23.

- 청나라(淸) 3

제 4대 대청 황제 - 강희제

<발전과 번영>

 

- 강희제의 통치

 

청나라는 순치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의 재위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는데 당시 황제의 친척이자 유력한 권력자였던 도르곤의 권력 독점을 우려했던 순치제는 4명의 보정대신(허셔리 소닌, 구왈갸 오보이, 나라 숙사하, 노후루 어빌운)을 임명하여 강희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4명의 보정대신들은 황실과 핏줄로 묶여있지도 않았으며 서로를 견제하며 황권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보정대신들 중 가장 강력했던 구왈갸 오보이가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황제에게 불손하게 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오보이는 역모를 꾸밀 생각은 없었으나 그의 개인적인 오만함과 정치적 보수성은 어린 황제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1669년에 강희제는 오보이를 속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강희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노회한 대신을 15세의 어린 나이로 무찔렀다는 평가를 받아 평판이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초기 만주족 지도자들은 2개의 법제를 확립하여 청나라의 통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는 선대 왕조들에게서부터 물려받은 유교 사상과 관료 제도였습니다. 만주족 지도자들과 한족 유생들은 서로 협력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만주족이 실시한 과거제도가 투항한 한족들도 관직에 진출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양측의 갈등이 상당히 진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저항하는 한족들은 죽이고 노비로 만들어 만주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당시 명나라 청나라에서는 인구 대부분이 어느 족에도 포함되지 않는 농민들이였습니다. 당시 귀족들만이 한족을 내세울 수 있었고 대부분위 중국 인구들은 한족이라는 족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성씨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나라 등 예전 성씨를 가지고 한족이였으나 평민으로 강등괸 한족들은 성씨를 가지고 있었고 귀족 한족들에게 성씨를 받아 한족 성씨를 사용하게 된 백성들도 있었으나 중국의 대부분의 인구는 성씨가 없는 백성들이였습니다. 황제의 지원 하에 편찬된 강희자전은 만주족들에게 공자와 유교에 대한 배움의 필요성을 일깨웠으며 1670년대에는 강희제가 친히 황실 칙령을 내려 유교적 가치들을 중국 전역에 널ㄹ 퍼뜨리고자 하였습니다. 다만 전족과 같은 사회적 악습들을 폐지하고자 한 노력은 딱히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청나라가 사회 안정을 위해 끌어온 나머지 하나의 해결책은 만주족이 가지고 있는 중앙아시악적 특성이었습니다. 만주족의 중앙아시아적 특성은 만주족이 몽골조, 티베트인, 오이라트인들에게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고 이들이 한족들보다 훨씬 대우받았습니다. 이들은 한족들을 무시하고 법에서 유리하여 한족들을 쉽게 유린하였습니다. 전통적인 중화사상에서는 중원에 살고 있는 한족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민족들을 야만족으로 치부하였으나 청나라의 황제들은 이같은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건륭제의 경우, 그 자신을 달라이 라마와 함께 티베트를 보살피는 '법륜성왕'이라고 칭할 정도였습니다. 강희제는 명나라 시절에 중국에 발을 딛은 예수회 선교사들도 포용하였는데 특히 아담 샬, 토마스 페레이라와 같은 무기 전문가, 수학자, 천문학자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유용한 인적 자원으로 활용하였습니다. 허나 예수회와의 이런 호의적인 관계는 전례 문제가 불거지고 난 이후 종결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3명의 번왕들은 점차 힘을 키워나가며 결국 중앙정부의 통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수순까지 이르렀습니다. 결국 1673년 번왕들 중 한 명인 상가희가 강희제에게 상소를 올려 은퇴를 요청하였고 자신의 자리를 장남에게 물려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상가희의 은퇴는 허락하였으나 그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허락치 않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머지 2명의 번왕들도 강희제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하여 동시에 은퇴를 선언 후계자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움직임은 오히려 젊은 황제를 크게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황제는 번왕들에게 하사하였던 봉토들을 모두 회수해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봉토와 작위를 모두 빼앗길 처지가 되어버린 번왕들은 더이상 남은 선택지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 밖에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번왕들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오삼계는 나머지 번왕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삼번의 난이라고 하며 약 8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삼계는 중국 남부인들의 만주족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여 청나라에 반기를 들게 하고자 하였고 양쯔강까지 세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오삼계는 명나라를 다시 재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왕조를 세워 황위에 오르고자 하는데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동료 번왕들과 제대로 소통을 하는 데에 실패했고 결국 양쯔강 이북으로 북진하는 것을 망설이며 강희제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세를 가다듬을 기회를 주어버리고 맙니다. 강희제는 새로이 구성된 만주 군대를 가지고 역습을 감행했고 1681년 경에 이르자 청나라 정부는 몇 십년 만에 다시 중국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한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만주족으로 구성된 팔기군을 주로 동원하였습니다. 또한 원나라 때의 정책을 빌려 한족들이 칼같은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엄격히 감독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족들은 청나라 시절 반란에 자주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강희제는 특히 만주족 장군들을 임명하여 한족 반란진압의 선두로 내세웠는데 이는 만주족 장군들을 내세워 한족들을 유린하고 노비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군을 내세워 반란군 사이에서의 분열을 유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의 세력을 중앙 아시아에서 뻗치게 하기 위하여 강희제는 친히 중가르족을 상대로 외몽골 지역에 원정을 실시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성공적으로 중가르 칸국의 칸이었던 갈단의 침략군들을 외몽골 지역에서 몰아냈고 제국의 권역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참고로 청-중가르 전쟁에서 갈단은 전사했습니다. 이후 갈단의 패잔 세력들이 청나라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대신 티베트로 도망쳐 달라이 라마의 힘을 빌어 청나라에 대항하려 하자, 강희제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로 군대를 파견하여 청나라에 친화적인 달라이 라마를 새롭게 세워버렸습니다. 1683년 청나라는 대만 섬을 지배하던 정씨 왕조의 마지막 왕 정극상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었습니다. 정극상은 청나라를 상대로 맞서기 위해 대만으로 도망친 명나라의 장군 정성공의 손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정극상은 이후 해징공의 작위를 받았고 베이징의 고위 권력층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만 대만이 청나라와 통합된 이후에도 명나라의 후손들 몇몇은 여전히 대만에 남았으며 청나라가 귀국을 권유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섬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강희제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 안정을 꾀하였습니다. 참고로 네르친스크 조약은 청나라가 처음으로 서구 세력들과 맺은 근대적 조약으로 이후 약 200여 년동안 청과 러시아 간의 국경 분쟁을 잠재웠습니다.

 

강희제는 약 61년간 재위하며 청나라의 경제력, 군사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17세기 후반, 중국은 청나라의 지배 하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명나라 이래 가장 안정적이고 발전된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