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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淸) 4

by cpark240 2023. 5. 24.

청나라(淸) 4

대청 5대 황제 옹정제
대청 6대황제 건륭제

<옹정제, 건륭제의 통치>

 

청나라는 강희제를 이어 즉위한 옹정제와 건륭제 시기에 최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무려 1,3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다스렸으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삼대에 이은 청나라의 이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오랫도앙 지속된 평화와 안정으로 인하여 결국 건륭제 말기에는 점차 쇠퇴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두고 서양 학자들은 '오후의 태양'과 같았다고 평했습니다. 즉 더없이 밝게 빛나지만 점차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강희제가 1722년 겨울에 사망하자 강희제의 네 번째 아들인 옹친왕(雍親王)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했습니다. 강희제 말기에는 강희제 사후 황제의 자리를 두고 윤진을 비롯하여 형제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 다툼으로 인하여 옹정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이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소문으로는 강희제가 사실 윤진이 아니라 14번째 아들인 윤제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윤진이 유언을 조작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도록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 사료는 없으며 강희제는 실제로 윤진과 함께 정무를 처리하였으며 중대사를 그에게 일임할 정도로 윤진을 매우 신임하였습니다. 한편 옹정제가 45세의 나이로 황휘에 오른 직후, 그는 강희제 말기부터 쌓여왔던 국가의 병페들을 해결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옹정제는 강희제 때부터 이미 정무 대소사를 맡아왔던 터라 정치에 대해 훤히 꿰고 있었고 이 경험이 옹정제의 선천적인 조심스럽고 질투 많고 의심이 많은 성품 그리고 매우 뛰어난 개인적인 능력과 합쳐지자 옹정제는 즉위 직후부터 가히 명군이라 불릴만한 치세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옹정제는 빠르게 행동했습니다. 먼저 그는 유교의 기틀을 다잡았고 당시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있었던 유학자들 중 자신이 비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숙청하여 유교 계통을 일원화했습니다. 1723년에는 그리스도교를 불법으로 규정했고 선교사들을 대거 쫓아냈습니다. 다만 실질적인 학문을 가지고 있었던 몇몇 소수 선교사들은 수도에 그대로 남아있게 해주었습니다. 옹정제는 강희제 때 만들어진 '장표(章表)' 제도를 확충했는데 이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각종 장계들이 복잡한 관료제도 사이에서 사라지거나 누락되는 일 없이 곧바로 황제에게 전달 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군기처를 설치하여 군기대신들을 임명, 개인적인 조언들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이 군기처의 권한이 확대되어 제국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변모하게 됩니다. 

 

옹정제는 몽골족 관료들과 만주족 관료들을 적절히 섞어 채용하며 양쪽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강희제 때부터 시작된 재정난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자, 옹정제는 지방 지주들에 대한 대우를 훨씬 더 엄격히 하였으며 토지세를 더 내도록 압박하였습니다. 이렇게 더 걷힌 세금들은 지방 관리들의 봉급, 치수 사업, 학교, 토목 사업, 자선 사업 등에 쓰였습니다. 이러한 재정적인 개혁 조치는 중국 북부에서는 그나마 잘 먹혀들었으나, 지주들과 관리들이 서로 깊이 결탁하고 있던 양쯔강 이남에서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옹정제도 이 문제점을 인지하여 만주족 장군들을 보내면서까지 양쯔강 이남에도 조세 개혁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반발이 워낙 극심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결국 재정남은 옹정제 시기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옹정제는 외교적인 문제에도 신경을 많이 쏟았습니다. 그의 재위기에 만주족으로 이루어진 협상단이 러시아와의 외교 갈등을 잠재우기 위하여 캬흐타 조약을 1727년에 체결하였습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무역권을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맞바꾸었는데 러시아 상인들에게 무역 이권을 주는 대신 외몽골에 대한 전적 권한을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토한 중가르 족과 중국 남서부의 묘족이 다시 준동하자 옹정제는 이들도 빠르게 진압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군대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 되었습니다.

 

옹정제는 1735년에 죽었습니다. 이후 그의 24살 아들인 보친왕(寶親王) 홍력이 건륭제로 즉위하였습니다.  건륭제는 신장과 몽골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 수많은 군사 정복을 감행하였고 티베트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는 동시에 중국 남부에서 일어난 반란들도 빠르게 진압하는 등 수많은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건륭제는 군사적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사고전서의 편찬을 지시했는데, 사고전서란 총 3,400권이 넘는 중국 전통 문학 전집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방대한 양의 도서물이었습니다. 다만 건륭제는 사고전서 발행 작업 도중 검열도 많이 하였는데 만일 특정 간행물이 황제의 입맛에 맞지 않거나 청나라의 안위에 위협이 된다면 이를 빼버리거나 아예 태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서 작업은 순치제와 강희제때부터 내려온 것이기는 하였으나 건륭제 시기에 들어서는 아예 주기적으로 진행되며 정기적인 행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건륭제 시기에만 총 53번이나 도서 검열 작업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문자의 옥이라고 합니다.

 

건륭제 통치 말기, 제국은 외형상으로는 번영과 안정을 누리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썩어들어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던 젊고 잘생긴 만주족 장군 화신은 황제를 등에 업고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며, 중국 역사상 최악의 간신들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화신의 패악이 워낙 극에 달했기에 건륭제가 죽은 직후 즉위한 가경제는 곧바로 화신을 자살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에 중국은 점차 과잉인구로 신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내전과 전염병으로 인하여 인구가 어느 정도 조절이 되었는데 번영과 안정이 워낙 오랫동안 지속되자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미국에서 유입된 감자와 땅콩고 같은 작물들은 식량 생산량을 크게 늘렸기에 인구 증가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18세기 동안 중국의 인구는 1억 명에서 3억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농지가 태부족해졌고 농민들은 더 비좁고 힘들게 일해야만 간신히 먹고 살만큼 벌 수 있었습니다. 건륭제도 이와 같은 문제를 알고 있었고 '인구는 계속 느는데 땅은 그렇지 못하구나'라고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청 제국에서 유일하게 농사가 가능한 지역들 중 사람들이 아직까지 많이 개척하지 않은 곳은 만주 지역이었는데 이 곳은 청나라가 만주족의 발웑로 신성시하던 지역으로 한족의 출입을 금지하였던 곳이었기에 사람들이 물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몽골 부족들은 한족 거주 구역으로 들어가 한족들을 노비로 삼고 유린 할 수는 있었습니다. 몽골인들이 서로 힘을 합쳐 청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가 컸습니다. 몽골 순례자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그들 부족의 땅을 잠시 떠나고 싶어할때조차 청나라에서 특별히 발급한 통행증을 받아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다만 청나라가 이같이 만주 지역에 한족의 출입을 금지였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에 흉작과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들이 연이어 터지자 청나라는 한족 유민들을 어쩔 수 없이 만주 지대로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핍박받던 한족들은 만주로 합법적 불법적인 방법 모두를 이용하여 밀려들었고 만주 지역의 지주들도 그들을 이용하여 땅을 개간하고 싶어했기에 그들을 딱히 막지 않았고 오히려 환영하기까지 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자 일반 농부들은 거의 50만 헥타르에 달하는 농지를 경작했으며 이 중 203,583 헥타르는 귀족, 팔기군, 나라 소유의 토지였습니다. 당시 중국 대부분의 백성들은 만주족도 한족도 아닌 어느 족도 내세울 수 없었고 그저 백성이라고 불렸습니다. 

 

한족이란 것은 족보를 가진 귀족들만 쓸 수 있는 명칭이였고 그것도 당연한 것이 중국이라는 근대 이전 국가는 유럽이나 다른 국가들과 같이 거대한 노예를 운용하고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운영되는 국가였는데 귀족인 한족들이 같은 한족들을 노비로 부릴 수 없었고 노비들이 노비들을 부리는 귀족들에게 같은 한족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은 한족에도 포함되지 않는 백성들이였습니다. 물론 이민족들은 이들이 한족인지 노비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에는 모두를 한족이라고 칭했고 귀족인 한족이 강등되어 평민으로서 한족 성씨를 가진 자들이나 노비나 일반 백성 농민이면서 한족의 성씨를 받은 자들도 있었지만 당시 한족들이 부리고 있고 노비들이나 백성들은 귀족들보고 자신들도 같은 한족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백성들은 아무런 족에도 포함되지 않고 성씨 또한 없었습니다. 청날라 시절에 만주족과 한족의 인구는 비슷했습니다.

1796년, 백련교는 청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선포하였고 결국 백련교도의 난이 터져 1804년까지 약 8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백련교도의 난은 청나라의 번영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 때부터 청나라는 차츰차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 쇠퇴와 반란>

 

중화 제국은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질서을 유지하며 조공을 바탕으로 한 외교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이번원과 예부가 몽골, 티베트 등의 속국들과의 관계를 관할하였고 명나라 시절부터 내려온 느슨한 조공, 사대 체제가 동아시아 국가들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하여 러시아와도 그럭저럭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해가고 있었던 것십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중화 헤게모니는 18세기에  크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유럽 열강들이 점차 해양 무역을 바탕으로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으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세워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럽 열강들은 인도를 장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과 가까운 인도네시아 지방의 섬들까지 대거 자신들의 세력권 내로 편입시켰습니다. 당시 나라는 1756년에 광동 체제를 설립하여 오직 광저우에서만 유럽인들과의 무역을 허가하고 중국 상인들에게만 독점적인 무역 이권을 부여하고 있었고 영국 동인도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각국의 허락을 받아 중국과의 무역을 제한되게나마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1793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영국 정부의 지원 하에 조지 매키트니 경을 필두로 한 사절을 중국으로 보내 평등, 호혜주의에 기반한 자유무역을 허가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허나 당시 청나라 조정은 영국과는 다르게 무역을 딱히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굳이 서양 세력들과 문호를 개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건륭제는 매카트니 경에게 '조공국들의 왕들이 온갖 값진 것들을 들고 우리에게 바치러 온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없는데 무엇하러 그대와 무역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라 조정이 제한적이고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무역만을 허가했기에 유럽 무역 회사들은 중국으로 은을 주는 방법으로 물건들을 사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비단, 차, 도자기와 같은 중국제 물품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이 무역을 멈출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1700년대 후반에 이르자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너무나 많은 양의 은이 순손실되고 있다는 점을 파악, 이를 해결하려 시도하였습니다. 이 때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이 바로 강력한 마약인 아편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점차 아편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눈치빠른 서양 열강세력들은 이를 사업 기회로 포착한 것입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 벵갈 지방에서 아편의 생산을 크게 늘렸고 이를 중국에 수출하여 무역으로 인한 영국의 은 유출을 상쇄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작전은 대성공했고 마약 무역은 극도로 성행하여 급기야는 이제 청나라에서 은이 유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도광제는 은의 유출, 아편 중독으로 인한 사회적 병폐를 막기 위하여 임칙서을 파견하여 아편 무여글 뿌리뽑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임칙서는 1839년에 무역항에서 영국 상인들과의 합의도 받지 않은 채 아편 상자들을 몰수하여 태워버리는 등 강경책을 펼쳤고 이는 결국 영국 정부의 반발을 사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