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淸) 5
<중국을 갈라 먹고 있는 열강 세력>
1차 아편 전쟁은 청나라 군대의 취약성, 무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목재 정크선으로 구성되어 있던 청나라 해군은 현대적인 장비와 전술을 갖춘 영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밀렸고, 더 발전된 총기와 대포를 갖춘 영국 보병들은 지상전에서 청나라 육군을 쓸어버렸습니다. 청나라는 1842년에 결국 항복했고 이는 청나라의 자존심에 크디큰 상처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중국을 낮잡아보기 시작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전쟁 종결 직후 난징 조약이 1842년 체결되었고 이로서 상하이, 광저우 등 5개의 항구가 서양에 강제로 개항되었으며 홍콩 섬은 아예 영국에 임대시켜야만 했습니다. 이 같은 굴욕적인 조약은 청나라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왔고 그동안 쌓여왔던 만주족 통치에 대한 반감과 합쳐져 이후 청나라에서는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청나라에서 일어난 한족의 첫 대대적 반-민주 운동이었습니다. 최악의 기근과 사회적 불안정 속에서 빠르게 퍼진 태평천국의 난은 청나라 권력층에게도 엄청난 위협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잔
인한 내전으로 불리며 중국의 국력 자체를 크게 깎아먹었습니다.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약 14년 동안 지속되었고 2천만에서 3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추정됩니다. 태평천국의 난은 시험에 낙방한 유생 홍수전이 일으켰는데 1851년에 구이저우 성에서 시작하였으며 그 세가 점차 커지자 태평천국을 선포하고 왕을 자칭했습니다. 홍수전은 그가 신의 환각을 보았다고 주장했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고 믿었습니다.
태평천국에서는 노예제, 조혼, 아편 흡입, 전족, 사법 고문, 우상 숭배 등이 모두 금지되었으며 나름대로 사회를 개혁하고자 노력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너무나 빠른 성장은 내부적인 부패를 불러왔습니다. 게다가 외세을 배척하는 태평천국과 홍수전의 사상에 불안을 느낀 프랑스와 영국 열강들은 청나라의 편에서 반란 진압을 도와주기로 결정하며 군대를 투입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자 했습니다. 1864년이 되어서야 지휘 하에 반란이 진압되었으나, 청 제국은 이미 회복 불가능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반란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아 이후 무슬림들과 묘족들 그 외 소수민족들도 독립을 요구하며 청나라에 연쇄적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서구 세력들은 이전에 맺은 난징 조약으로만은 성에 차지 않았고 태평천국의 난과 그 외 반란들에 군대를 파견하여 청 정부를 도와준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조약을 맺어줄 것을 강요했습니다. 한편 청나라는 반란 도중 막대한 농토가 파괴되어 세입이 급격히 줄었으며 수백만 명의 국민들을 잃었으며 점차 영토에 대한 통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지방에서는 수없이 많은 독립적인 군사 세력들이 힘을 길러 스스로를 지키려 하였으며 일부는 자경단이나 군벌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1854년 영국은 난징 조약을 재검토하여 줄 것을 요구했고 영국 상인들이 단순히 항구뿐만 아니라 중국의 강들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인근 도시에서 거래를 할 수 있을 것, 베이징에 영구적인 영국 대사관을 설치해 줄 것을 강요했습니다.
1856년 청나라 관리들이 해적을 찾기 위하여 영국 국적의 배 위에 허가 없이 올랐고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찾던 영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썩어가던 청나라 군대는 이 전쟁에서도 속절없이 무너졌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당시 황제였던 함풍제는 1858년에 톈진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에는 모든 중국 공문서에 한자오 함께 영어를 혼용하여 함께 써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고, 모든 영국 군함들에게 항해 가능한 모든 중국의 강에 대한 출입을 허가한다는 일종의 말도 내용이 들어있었기에 중국인들은 이 조약으로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중국을 이미 만만하게 보기 시작한 서구 세력이 톈진 조약을 바로 다음 해에 개정하자 중국인들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베이징으로 진군했고 황제와 조정은 수도를 버리고 청더로 피난을 갔습니다. 베이징에 입성한 서구 군대는 황제의 여름 궁전인 원명원을 약탈, 방화시켜버렸습니다. 베이징에 남아있던 공충친왕 혁흔이 황제 대신 베이징 조약에 강제로 서명했고 이 조약을 통해 중국은 또다시 막대한 이권을 빼앗겼습니다. 당시 영국,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의 중재 역할을 맡은 러시아 제국에게는 외만주를 영구 할양하였고 베이징에는 외국 공사관의 주재를 영구 허용했던 것입니다. 한편 칭더로 도망친 황제는 그 다음 해에 바로 사망했습니다.
<실패한 개혁>
청나라는 이미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으나 좌종당 같은 몇몇 유능한 관료들은 반란을 진압하고 만주족의 편을 들어 중국을 다시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았습니다. 동치제가 1861년에 5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을 때, 이러한 개혁파 관료들은 '동치중흥'이라 하여 중국을 개혁시키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발표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유교적 가치는 지켜내는 동시에 오직 서구의 군사 기술만 받아들여 힘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증국번과 같은 관리들은 이홍장고 같이 상대적으로 젊은 관리들을 키워 인적 자원들을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참고로 이홍장을 위시한 이 한족의 이들이 청나라를 일부 경제적으로 안정시켰으며 양무운동을 통해 청 개혁을 주도한 것입니다. 개혁파 관리들은 중화 역사상 처음으로 외교만 전담하는 전문 기구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창설, 외국 외교관들이 베이징에 상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해관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해관을 개설하고 서양에서 무기들을 수입하며 북양함대와 같이 현대적인 군대를 키우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았습니다.
청나라는 점차 영토들을 조금씩 조금씩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조 하에 러시아 제국은 1860년에 연해주를 통째로 가져갔고 다른 서구 세력들도 각종 명분으로 영토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한편 개혁파 관료들과 서구 세력 간의 협력은 1870년에 일어난 톈진 교안으로 단절되었습니다. 참고로 톈진 교안이란 톈진에서 발생한 반기독교적 폭동으로 프랑스 수녀원에서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절대다수의 수녀들이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프랑스는 1858년에 코친차이나 원정을 시작, 동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확대했고 나중에는 중국과 국경을 접할 정도로 그 세를 불렸습니다. 이후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던 청나라와 갈등이 쌓이다가 결국 청.프전쟁이 터졌고 이 전재에서 또다시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1885년에 톈진 조약(1885년)을 맺으며 프랑스의 베트남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1884년에는 일본에서 교육받은 조선의 개혁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 청나라가 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내에 군대를 투입하면서 일본과의 갈등이 커졌는데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이 톈진 조약을 맺고 양국 군대가 조선에서 동시에 철수하기로 합의보며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1895년에 발발한 1차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일본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했고 타이완섬을 일본에게 넘겨주어야만 했습니다. 본디 일본은 청나라에 더 심한 요구를 할 작정이었으나, 일본의 시민들이 중국의 대표로 참석한 이가 삼국 간섭을 통하여 일본에 압력을 넣어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 줄 수 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까지 패배함에 따라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났고 청나라의 구시대적 봉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신기술만 적용하려 하였던 표면적인 개혁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서태후가 점차 국정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1850년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였고 1861년에 그녀의 5살 아들 동치제가 황위에 오름에 따라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서태후는 동태후와 함께 섭정을 통하여 아들을 제치고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습니다. 다만 동태후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거의 섭정은 서태후가 한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서태후는 1861년부터 1873년까지 섭정을 하였는데 이때 서태후가 직접 동치제의 연호를 '동치', 즉 함께 통치한다는 의미로 정한 것입니다. 1875년에 동치제가 서거하자 서태후의 조카인 광서제가 황위에 올랐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 재위기에도 섭정을 자처했고 1881년 봄에 동태후가 43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독보적인 1인자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1889년부터는 광서제가 성년에 이르러 스스로 통치하기 시작했고 서태후는 여름 궁전에서 반쯤 은퇴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897년 11월 1일, 2명의 독일 가톨릭 선교사들이 산둥성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은 이 사건을 빌미 삼아 자우저우 만을 해군력으로 강제 차지했습니다. 1898년은 중국에게 '치욕의해'로 기억되는데, 이 해에 독일은 자우저우 만을,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를, 영국은 홍콩을 강제로 할양받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광서제는 무술변법, 즉 변법자강 운동을 통해 중국을 새롭게 탈바꿈시키고자 했습니다. 1898년에 캉유웨이.량치차오와 같은 더 급진적인 개혁 세력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개혁 운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황제는 여러 칙령과 계획을 짜고 봉건적 체제를 개선하고 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서구적 교육을 받은 관리들을 임명하여 국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 권력층의 반대는 완강했습니다.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들은 이에 극심하게 반발했고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서태후.위한스카이.이홍장 등 보수세력의 반격(무술정변)으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킨 직후 광서제를 유폐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개혁주의자들을 처형하고 정책을 다시 예전으로 되돌렸습니다. 다만 서태후 자신도 개혁의 필요성을 인지하고는 있었기에 변법자강운동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며 몇몇 중요한 개혁 조치들은 그대로 유지하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중국 북부에서 일어난 기록적인 가뭄이 유럽 열강들의 교묘한 간섭과 청나라의 불안정과 합쳐지자 민심은 유례없을 정도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1900년에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외국 선교사들을 학살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 죽였으며 청나라의 묵인 하에 점차 그 활동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의화단원들은 베이징의 조계에 침입하여 외국인들을 몰아내려 하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럽, 일본, 러시아 군대가 합쳐져 만들어진 8개국 연합군이 중국에 아무런 통지 없이 진입했고 서태후는 이들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는 패배를 거듭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징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서태후는 서안으로 도망쳤고 베이징과 자금성은 연합군에게 무자비하게 약탈당했습니다.
연합국들은 청나라에게 엄청난 이권 침탈 관련 요구를 담은 베이징 의정서 체결을 요구했고 심지어는 자신들이 출전하는데에 쓴 비용마저도 모두 청나라가 지불 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에 반대할 힘이 없었고 이를 모두 수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해혁명과 멸망>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20세기 초에 이르자, 중국은 거의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으며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서태후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01년에 황실 칙령을 내려 전국의 관리들에게 개혁 정책을 필 것을 요청했고 청말신정이라 하여 청나라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청말신정은 과거의 그 어떠한 조치보다도 가장 폭넓게 실행된 청나라의 마지막 개혁 정책으로 국가 주도 교육 시스템의 설립과 1905년의 과거제 폐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한편 유폐된 채 살고 있었던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에 생을 마쳤고, 바로 다음 날에 서태후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문에 서태후 혹은 위안스카이가 환관들을 시켜 일부러 광서제를 독살 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광서제의 시신 부검한 결과 치사량을 훨씬 상회하는 양의 비소가 그의 몸 속에서 발견되며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어쨌든 광서제가 죽은 이후 광서제의 조카이자 순친왕(醇親王)의 아들이었던 푸이가 2살의 나이에 선통제로 즉위하였습니다. 순친왕이 섭정을 맡았으며 그는 섭정기 동안 위안스카이 장군을 직위해제하고 권력을 박탈했습니다. 1944년 4월 순친왕은 거의 대부분이 황족으로만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여 국정을 처리하였습니다. 이는 장지동과 같은 원로 대신들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결국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하며 청나라는 중국의 중앙정부 지위를 쑨원이 건국한 난징의 중화민국에게 뺏기고 맙니다. 이후 많은 지방들이 청나라에게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급박해진 청나라 조정은 위안스카이를 불러 다시 군사권을 일임하였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의 자리를 얻은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내각을 따로 구성하였고 나중에는 황제의 친부인 순친왕을 섭정에서 면직해버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습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완전한 독재자로 군림했으며 청나라 황실과 선통제는 허울만 남은 껍데기였으며 청나라의 모든 실권은 위안스카이에게 있었습니다.
위안스카이와 북양함대의 지휘관들은 중화민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소모적이고 딱히 얻을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쑨원도 막강한 군력을 가진 위안스카이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 이제 막 건국된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쑨원과 협상을 벌였습니다. 쑨원은 자신의 목표가 민주적인 공화국을 세우는 것이며, 이 목표는 이미 중화민국 건국을 통해 이루었다면서 만일 위안스카이가 원한다면 중화민국 총통의 자리를 넘겨 줄 수 있다고 그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이어지던 협상 끝에 황실 최고 어른이었던 효정경황후는 선통제를 폐위한다는 내용의 황실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서 2천 년간에 달했던 중국의 군주제가 막을 내렸으며 청 황실 자체는 몰락을 겨우 면하고 청나라 소조정을 이루어 자금성 내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한 채 사직을 이어갔으나 이마저도 1924년 펑위샹의 정변으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이후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을 침략하여 1932년에 만주국을 세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만주국의 황제로 세우지만 보통의 경우 만주국은 일본위 괴뢰국으로 청나라의 후신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만주국은 1945년에 소련의 공격으로 인하여 멸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