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나라(新)
신(新, 8년~23년) 은 왕망이 전한의 뒤를 이어 창건한 왕조입니다.
신(新, 8년 ~ 23년)은 왕망이 전한의 뒤를 이어 창건한 왕조이다.
왕망은 전한 왕실의 외척 왕씨의 일원으로, 원제의 황후 효원황후의 비호 아래에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기원전 8년 대사마가 되었고 9세의 평제를 옹립한 후 안한공(安漢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제를 죽인 다음 유자 영을 세워 스스로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으며, 8년에는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황제에
즉위합니다.
왕망은 복고주의(復古主義)를 내세워 <周禮> 등 유교 경전을 근거로 하는 개혁 정치를 단행했습니다. 즉 고전에 입각하여 삼공과 구경 이하의 관직을 제정하고 정전법을 모범으로 하는 한전(限田)정책을 시행함과 동시에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으며, 국가 권력에 의해서 물가의 균형책과 전매제를 강화하여 상업을 통제하였고 또한 화폐를 개주(改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혁 정책은 실정에 맞지 않아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흉노를 비롯한 대외 정책도 실패했기 때문에 안 밖으로 불안과 동요가 고조되었습니다.
잦은 재해(재위 2.5.11년의 황하 범람)와 호족 세력이 반발하여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그 결과 적미(赤眉).녹림(綠林) 등의 농민 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또 지방의 여러 호족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여 왕조 개창 15년 만에 적미군의 침공으로 왕망은 죽임을 당하고 신 왕조는 멸망하게 됩니다.
- 후한(後漢)
후한(後漢, 기원후 25년~220년)은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입니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합니다.
신나라 말기, 한조 부흥 운동 과정에서 제위에 오른 경시제(更始帝)의 휘하에 있었던 유수는 곤양 전투에서 대활약을 펼치는 등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후 유수는 왕망과 하북 군웅들을 연달아 격파하면서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무능한 경시제에게서 독립하고, 경시제를 무찌른 적미군을 굴복시켜 후한 왕조를 창업하였습니다. 광무제는 선정을 베풀어 후한 왕조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후한 시대에는 채륜(蔡倫)이 세계 최초의 종이인 채후지를 만들고, 장형(張衡)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각 번창하였습니다. 그리고 반초(班超)가 서역의 여러 나라와의 교역길을 열어 실크로드를 다시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4대 황제인 화제(和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부터 예법 상 혹은 혈연 상 모후(母后)인 황태후(皇太后)가 임조칭제(臨朝稱制-황제를 대신해 정치를 주관하는 행위)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황태후의 친가로서 권력을 장악한 외척 세력과 성인이 된 황제(皇帝)가 친정을 도모하면서 이용한 최측근의 환관 세력의 권력 쟁탈로 정치는 점점 타락해 갔으며 사회 전반의 침체가 뒤따랐습니다. 안제(安帝)의 치세부터는 서쪽의 강족(羌族)이 변경을 자주 침입하였고,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치세부터는 당고의 화가 두 차례나 일어나면서 유능한 선비들이 정가에서 축출.제거되어 조정의 자정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고, 매관매직과 수탈이 빈번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갔습니다.
정국이 점차 어지러워지는 틈을 타 장각(張角)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결국 이 난은 정부군과 조정을 지지하는 군벌에 의하여 제압되기는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벌들의 힘은 강화된 반면, 후한 조정의 권위는 더욱 약해졌습니다. 결국 군벌들의 힘이 후한 왕조를 능가하게 되면서 천하를 둘러싼 영웅들의 대결이 펼쳐지고 삼국 시대가 사실상 개막되었습니다.
양주(凉州)의 군벌이었던 동탁(董卓)이 낙양(洛陽)에 입성하여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추대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웅 할거 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조조(曺操)는 헌제를 보위하는 데 성공하고, 숙적 원소(袁紹)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화북과 화중의 일부를 차지합니다. 이후 조조의 아들인 위(魏)의 문제(文帝) 조비에게 헌제가 제위를 넘겨주며 후한 왕조는 멸망하게 됩니다.
- 촉한(蜀漢)
촉한(蜀漢, 221년~263년)은 중국 삼국 시대 때 유비(劉備)가 지금의 쓰촨성 지역에 세운 나라로 정식 국호는 한(漢)이나 역사상 구분을 위하여 촉한이라고 부릅니다.
한 황실의 후예가 세운 마지막 한나라이기에 계한(季漢)이라고도 부르고, 나라가 위치한 지명을 따서 서촉, 촉 등으로도 불립니다. 연강 원녕(220년), 사실상 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위왕 조비가 헌제를 내쫓고 조위를 건국하자, 당시 익주를 점거하고 있었던 유비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221년에 황제임을 선언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연호를 장무(章武)라 하였습니다. 수도는 성도(成都)입니다.
선주(先主) 유비는 자신의 의동생인 관우를 죽인 오를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키는데, 이릉에서 육손의 계책에 크게 패하면서 백제성에 눌러앉게 되었고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유비 사후 후주(後主) 유선이 즉위하였고, 연호를 건흥으로 고쳤습니다. 승상 제갈량은 남만을 토벌해 맹획을 일곱번 사로잡고 놓아주었는데 이에 맹획이 항복하고 남만은 평정되었습니다. 또 제갈량은 북벌에 나섰는데, 이 때 올려진 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입니다. 하지만 진지.황호와 같은 간신의 전횡과 연이은 북벌 실패로 인해 촉한 궁중의 정치를 제대로 처리 할 사람이 없고 많은 힘이 소모되어 점점 쇠망의 길을 걸었으며, 특히 황호가 정권을 장악한 경요, 염흥 연간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